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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Mar 15. 2024

여자아이 기억 - 아니 에르노

1958년

먹어버리고 싶었다.

책을 딱 반 읽었을 뿐인데, 쓰여진 모든 문장을 먹어버리고 싶었다. 

마구마구 입에 넣은다음, 성급히 삼킨 뒤, 위에서부터 소장까지 천천히 소화시켜 내 살과 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교수님께서 왜 이 책을 읽고 과제를 하라고 하셨는지, 

아니, 그 사실을 떠나 이 작가가 이 책을 쓰기까지 얼마나 숱한 번뇌를 겪어야했는지,

그녀는 왜 이 글을 쓸수 밖에없었는지,


요동치는 가슴을 잠재우느라, 책을 가만히 엎어놓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그리고 위안을 얻었다. 저멀리서 밀려오는 밀물같은 동질감. 비단 나 뿐만아니라 그 누구도 D를 비난할수 없으며, 그 어떤 누구는 D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는것. 

여러번 들이치는 파도가 슬쩍 만조를 몰고오듯이, 그녀의 아픔에, 혼란에, 그녀를 향한 경멸에, 측은지심에, 그녀의 어리석음에, 순수함에, 그리고 날조된듯 써내려간 문장에 마음이 울렁임으로 가득찼다.


사실 한권을 다 읽고 소소한 서평을 올려야하지만, 

필사해야할 문장이 너무 많기에(순전히 모든 것을 흡수하고픈 나의 욕심때문이다) 1챕터에서 잠깐 필사한 뒤, 

나머지 내용은 다시금 써 내려갈까 한다.


문학과 예술은 인간을 구원한다.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알게해주기 때문에.




# 내가 한짓 중 그 무엇도 나는 부끄럽지 않아.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렇다고 말하는 일에 부끄러울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의 굴복과 편지, 보답받지 못한 사랑은 삶이 끝날 때까지 그녀를 계속 갉아먹고 불태워 버릴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하고, 비밀스럽게 그것을 견대내야 하는 것 보다는 확실히 그랬다. 모든것은 경험이었고, 그건 이로운 것이었다. 당신은 이제 책을 한권 쓸수 있을 것이고, 그를 등장인물중 하나로 만들수 있을것이다. 진지하게 음악을 시작하거나, 혹은 자살할수도. 


# 이는 복종도 동의도 아닌, 현실에 대한 당혹감일 뿐, 이마저도 이 사태속에서 내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 하더라도 이미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지 않았을 떄나 가능한. 여기에는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상황고 몸짓, 앞으로 이어질 순간의 주인인 타자밖에 없다.


#  그는 당신을 더러워진 팬티같은 현실세계에 버려둔다. 그러고나면 다른 이들은 쉽게 당신을 농락하고, 쉽게 당신이 놓여있는 텅빈 세계로 돌진한다.  -중략-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은 당신이 은밀히 선택한 주인을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스스로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당신은 가차없이 그에게서 멀어진다. 당신이 얼마나 정신이 나가 있었는지를 깨닫고 두번다시 그를 보고싶어하지 않는다. 당신은 모든것을 잊겠다고, 그에대해 결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 나 역시 그 여자아이를 잊고 싶었다. 정말로 그녀를 잊기를 , 그러니까 그녀에 대해서 더 이상 쓰고 싶은 굑구를 갖지 않기를, 그녀와 그녀의 욕망과 광기, 그녀의 어리석음과 오만, 그녀의 허기와 말라버린 피에 대해 써야만 한다고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를. 나는 끝내 그렇게 되지 못했다. 

언제나 일기속 문장들엔 S의 여자아이나 1958년 녀자아이에 대한 암시들이 있었다. 20년동안 나는 책을 쓰려는 내 계획속에 58이라는 숫자를 적는다. 그건 여전히 쓰지 못한 책이다. 언제나 뒤로 미뤄진. 차마 형언할수 없는 구멍.


# 가장 대담하다고 느끼는 방식은 이 둘을 나와 그녀라는 대명사로 분리하는 것이다. 있었던 사실과 행동들을 가능한 한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장 잔인하게, 마치 문뒤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그녀나 그라고 지치하며 수군대는 걸 듣는 방식으로. 그걸 듣는 순간 우리가 죽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 그녀는 일정한 '나'를 갖고있지 못하다. 그저 한권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 흘러가는 여럿의 '나'를 가질 뿐이다. 


# 마치 내가 계속 쓰기위해 그들이 살아있을 필요가 있는것처럼. 사람들을 허구의 존재라는 비물질성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들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평온속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주는 위험속에서,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서 쓸 필요가 있는 것처럼. 글쓰기를 지속하기 어려운 시도로 만들 필요. 글쓰기가 지닌 권능을 (수월함은 아니다. 아무도 나만큼 쓰는걸 힘들어하진 않는다.) 글쓰기가 가져올 결과를 상상하며 느끼는 공포로 속죄할 필요.


# 그녀는 버려졌다. 누더기 소녀처럼. 그녀에겐 아무것도 상관이 없다. 그녀는 더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온순하게 흥분한 무리의 손길에 그냥 몸을 맡긴다. 


# 글을 써 나갈수록, 내 기옥속 이야기가 기금까지 지녀온 단순함이 사라진다. 1958년의 끝까지 가는것, 그것은 수년에 걸쳐 내가 축적해온 여러 해석들을 산산조각 내겠다는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윤색하지 말기. 나는 허구의 인물을 축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였던 그 여자아이를 해체하는 것이다. 


# 황홀한 표류, 빈정거림과 비꼼, 모욕적인 언사들까지 모두 무감각하게 만드는 자기 인생의 가장 고양된 순간을 살고 있다는 감각. 


#  자각을 갖고 전부 해내는 여자아이들의 열의, 안전하게 이뤄지는 사도마조히스트들의 의식, 살갗의 절망을 모르는 모든 이의 꺼리낌없는 섹슈얼리티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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