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속의 나
몇일전 55364였던 나의 이름이 55464로 바뀌었다.
담당 시수가 월요일 5시간, 화요일 5시간, 수요일 3시간이었었는데, 동아리를 맡게되면서 수요일이 4시간으로 증1 되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수업시수 총 24시간을 자랑하는 클론 55464는 꽤나 잘 지내고있다. 함수(含水)광물이 변성작용을 거치면 무수(無水)광물이 되듯이, 55464는 탈수작용을 거치고있으며 거의 감성이 탈곡되었다.
조지오웰의 1984년도에 태어난 무수광물 55464는(이름한번길다) 긴 이름처럼 하루가 긴데, 사실 그 하루는 화장실을 가는 시간을 계산하여 움직여야할 정도로 빠듯하니 바쁘다.
55464는 수업시수가 많아 남은일을 공강시간에 처리해야하는데, 하필이면 몇일전 55464가 돌보는 33명의 고객님들 중 한분의 소중한 물건이 분실되어 분실사고를 처리하느라 첫끼를 18시에 먹었다.
급한대로 냉장고에 있던 딱딱한 피자와(크러스트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55464의 아들의 비상식량인 불닭볶음면을 한상차려 먹었다. 그 행동은 동시에 일어났는데, 너무 당분이 떨어진 나머지 냉장피자를 입에 물고, 커피포트에 라면물을 올리는 동시에, 한손으로는 학부모님의 전화가 울려, 한손엔 냉동피자와 한손에는 수화기를 들고 물이끓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통화를 마치고, 손에있던 냉장된 피자를 야금야금 먹은뒤, 교무수첩을 한쪽에 펼치고 라면이 불기를 기다리며 오늘 해나간 일들에 체크표시를 했다.
마침내 당분이 혈액을 타고 돌아, 현재 글을 쓸수 있음에 감사하며, 문장이 짧은것을 선호하는 내가 문장이 길어지는것으로 보아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했음을 알수 있고, 또한 글에 휴머를 섞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무수광물 55464의 일상은 썩 나쁘지 않다.
그간 비련의 주인공 놀이에 빠져있던 55464는 현실자각타임을 거쳐, 자신이 주변인이 될수도 있음을 이제서야!!! 자각하고, 체제속에서 열심히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 55464가 3주간 깨달은 몇가지 사항을 독자들과 공유하려한다.
1. 체제속의 일원인것도 가치있는 일이다.
2. 당신은 주인공이며 동시에 당신 자신은 누군가의 주변인이다.
3. 감수성이 지나치면 독이된다.
4. 자기일을 완수하는것은 칭찬받을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5. 자신이 슬퍼할때 누군가 위로해주길 바라지 마라. 위로는 오롯히 당신과 당신 자신의 몫이다.
6. 바쁜 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 아!! 이건 출처를 밝혀야해 (William Blake)
이거 뭐 쓰고보니 영화 이퀼리브리엄 남자주인공의 와이프가 빙의된듯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55464는 당분간 이 생활에 적응하는것에 딱히 불만이 없고, 기름기 쏙빠진 냉소주의에 다시한번 발을 들인것에 대한 묘한 안도감이들어 앞으로 당분간은 기름칠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것을.
아. 희망적인것은 55464에게도 아직은 인간미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55464의 직속 부장과 함께 야근할 일이있었는데 하필 도난사건 관련 업무였고, 몇주동안 처음으로 남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것도 아주 뿌엥 엉엉 울었는데, 사실 이불킥을 날릴 일이기도 하나, 타인 앞에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아직은 완전히 클론으로 변모하지 않은 반증일것이다.
55464는 문장을 짧게 끊어 쓰는 버릇을 잃어버린 듯 하다. 주말에 사랑하는 식구들과 봄바람을 쐬지 않으면 지금 타자를 쓰는 손가락 끝이 가진 유머까지 잃어버릴지도 모를일이다.
다행인것은, 집에 돌아오면, 55464에서 '나'로 조금씩 말랑해져 간다는것.
집에서 받은 사랑과 안정감으로 말랑해진 나는 내일 또 55464가 되기위해 출근을 하겠지.
주말에 완전히 말랑말랑해진 55464가 당신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도 모르겠다.
그대들이여 말랑해진 55464의 연락을 받아주길.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더 말랑해지는 하루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