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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May 30. 2024

나의 비누들에게.

어른으로 사랑한다는 것.


많은 시간을 기다림 속에서 살았다.

온전해질 수 있다는 희망, 누군가에게 오롯이 기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나 또한 누군가의 비누받침처럼, 그렇게 기댈 곳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다.


때때로는 더욱 고립되기도 하였다. 나의 비누받침은 부모님도, 친구도, 당신들도 아니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나의 비누받침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주길 바랐지만, 결국 그 바람은 낙담의 방점으로 내 가슴에 구멍을 냈고, 그 방점들은 점묘화가 되어 이정표라는 그림을 그렸다.

방점으로 이루어진 이정표대로 살아가는 것에 순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점으로 그려진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니 지금의 내가 있었다.


결국 그대의 비누이고 싶었던 나는 방점 투성이가 되었다. 

이 글이 사랑의 맥락이라고 생각하는 그대의 생각이 결코 틀린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모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고, 친구나 연인에 대한 사랑이야기 일수 있다.

그게 부모이건 당신이건, 나의 솔직함과 당돌함, 서투름을 버거워했다. 

애시당초 어릴 적 부터 '기댄다'는 것을 학습하지 못한 나는, 균형 있게 비누받침에 기대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미끄러지며 어리석게도 당신들을 원망했다.


사랑과 친밀함에 매번 눈이 멀었고, 그것은 맨손으로 장미의 줄기를 훑는 것과 같이, 한 번도 빠짐없이 내 손에 생채기를 내었다.

솔직함을 장착한 알몸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서투름'으로 그대들에게 다가간다는 사실을 이제껏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라도 나는 어른스러운 사랑을 하려고 한다. 

문득 내가 사랑하고 살아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게 부모이던, 연인이던, 친구이던, 내일보다 젊은 오늘을 살아야 하기에.


나에게 받침이 되지 못했던. 되려 비누 같은 부모님을 좀 더 살펴야 할 것이며,

내 이름을 불러주기 위해 다가온 그대들에게 감사할 것이다.

떠나간 이들에게도 지난날 나의 서투름에 대해 용서를 구할 것이며,

비누가 되기보다는 비누받침이 되어 비스듬히 누운 채 그대들을 기다릴 것이다.

떠나가는 인연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며, 다가오는 인연들에 냉담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쉽지 않겠지만, 나를 절제해 가며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내일의 나보다, 지금의 나는 더 빛나는 젊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기에 난 조금 더 먼 길로 돌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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