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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Nov 10. 2023

체실비치에서 - 이언매큐니언

아픔으로 끝난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사회적 표현의 자유와 여러 매체가 억압받는 시대. 그들은 서로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게 된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성장과정이 중간중간 시놉시스처럼 얽힌 구조로 짜여 있는 소설이다. 소설기준의 현재시점은 저녁식사 후 약 두세 시간에 걸쳐 있다. 

오히려 현재시점보다 과거의 성장과정에 더 초점을 둔 듯하다. 


정신분열이 있던 에드워드의 어머니, 그 밑에서 어렵게 자라온 에드워드. 부유한 가정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감증으로 살고 있는 플로렌스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필연적인 어느 한 시점에 만나 서로를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게 된다.

누구의 방식이 옳고 그르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들 개개인의 역사에 서로는 번개처럼 혹은 변하지 않는 파도처럼 등장한 것뿐이고, 아직 미성숙하고 삶의 경험이 부족했던 그들은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이라는 게 뭘까.

왼손약지에 반지를 끼고 서로를 평생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는 것? 에드워드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제도? 플로랜스가 바라는 삶의 울타리?


에드워드와 플로렌스가 미리 서로에게 솔직했다면 어땠을까.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털어놓으며 자신의 심적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나는 너와 첫 경험이라는 걸 에드워드가 먼저 말했다면,

자신은 자신의 꿈이 더 소중하며, 에드워드 너를 사랑하지만 성적욕구는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플로랜스가 먼저 이야기했다면.


두 사람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결혼은 미숙함에서 비롯된다. 서로를 서로의 프레임에 맞추어 바라본 뒤. '이 정도면 되었다'라는 생각을 미칠 만큼 사랑한다로 둔갑시키는 것. 그래서 적당한 시점에 사회적으로 독립하는 것. 자신에 대한 이해나, 너에 대한 이해를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진행된다는 것. 


자신에 이해의 결핍에서 시작된 결혼은 그래서 슬프다. 혹은 무지에서 시작했기에 행복하다.


# 지금껏 그녀가 만났던 누구와도 달랐다. 그는 줄을 서거나 대기실에 앉아 기다리는 시간을 대비해 재킷 주머니 속에 늘 문고판책, 주로 역사책을 넣고 다녔고 몽당연필로 읽은 부분을 표시해 두는 사람이었다. 


# 그녀는 그의 왕성한 호기심, 은근한 시골말씨, 엄청나게 센 손힘, 이야기 도중에 삼천포로 빠지는 엉뚱한 말들, 그녀를 대하는 상냥한 태도가 무척이나 좋았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갈색 눈은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다정한 구름에 폭싸이는 느끼을 주었다.


# 구식 블루스타킹


# 이렇게 경이롭고 마음이 훈훈해질 정도로 특별한 사람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고 자의식이 강해 마치 전기를 띤 입자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과 몸짓에서 모든 생각과 감정이 흘러나와 빤히 다 들여다보이는 듯한 그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이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그녀의 양손은 에드워드의 엉덩이 위에 순전히 형식적으로 놓여있었다. 돌이켜보면 플로렌스는 이때 자신이 너무나 자명하고도 공허한 진실과 조우했음을 꺠달았다. 데인겔트나 초야권만큼 원시적이고 오래된 너무나 단순해서 정의할 수 조차 없는 진실. 그녀는 결혼하기로 하면서 정확히 이것에 동의했었다. 


# 그녀는 그 장소의 어두운 진지함, 빛바래고 허물이 벗겨진 무대 뒤편의 벽, 현과 복도의 빛나는 나무 세공과 짙은 붉은색 카펫, 금박을 입힌 터널 같은 관객석,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덩이로 재현된 하모니의 수호신을 통해 음악의 위대한 추상에 대한 인류의 갈망을 묘사했다고들 하는 무대 위의 그 유명한 둥근 천장을 사랑했다. 


# 그 여자를 자신이 그렇게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제 그는 그녀의 자기희생적인 제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 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삶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고, 머리띠를 한 어린 소녀가 그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 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 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 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리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 켜보았다. 힘겹게 자갈밭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도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모습이 창백한 여명 속에서 빛나는 쭉 뻗은 광활한 자갈밭 길의 흐릿한 한 점으로 사라져 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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