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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 Mar 10. 2016

이직(移職)

첫 출근, 울어버렸다.

일을 하는데 자꾸 눈물이 나서 혼났다. 

마침, 회사를 옮긴 날이다. 그것도 규모가 좀 더 큰 회사로 옮겨 기분이 좋아야 하는 날이다. 들떠야 마땅한 날이다. 이직한 사정이야 구구절절 읊으라면 얼마든지 읊을 수 있겠지만 그건 어차피 논외다. 문제는 좋아 죽어야 마땅한 첫 출근날 내가 서럽게 울었다는 것이다.  


떠나는 날 신나게 짐을 쌌더랬다. 작업한 사보 책자 한가득에, 나름의 몸보신이라며 야근 내내 먹었던 비타민, 작은 꽃병까지 캐리어에 꾹꾹 쑤셔 넣으며 '역시 캐리어 가져오길 잘했어'라고 스스로 흐뭇해하기까지 했다. 마침 3월 3일 삼겹살데이라 회사 식구들과 김치 삼겹살에 소맥까지 기분 좋게 들이켰다. (나만 기분이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갑자기 '난 이곳에서 빠지겠노라' 선언하며 휘파람을 부는 직원을 누가 예쁘게 봐줄까.) 일주일 만에 결정된 일이라 '이별'이라는 직감이 내 마음을 완전히 관통하지는 못했던 그 마지막 시간.  묘한 기분, 괜스레 울컥한 기분이 들어 술기운에 주책 맞은 눈물을 보이긴 했어도 그건 그 나름의 명분이 있는 눈물이었다. 어떤 눈물인지 의미를 정확히 알고 흘렸고, 울고 나선 꽤 후련했다.


그런데 오늘 말이다. 또 울었다. 

이 무슨 주책없는 짓인지. 서른 중반을 맞이한 어엿한 '성인 여성'의 첫 출근치고는 너무 궁상맞은 장면이 아닌가. 늙어서 감성적으로 변했다는 농을 치기엔, 내 눈물은 처절함에 가까웠다.


무엇이 나를 울게 한 것일까. 사보기자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사보에는 실로 다양한 '갑을병정'의 관계들이 존재한다. 그런 관계 위에서 줄타기를 하다 보면 종종 발을 헛디뎌 깊은 바다에 던져진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 속에도 나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 말이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내부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걸 느낀 순간. 사람이, 관계가 힘들어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유일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를 보고 웃어주는 사람, 나를 보며 비아냥거리는 사람, 나를 향해 격려를 보내는 사람,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드는 사람.


원했던 바도 아니었건만 내 모습이 의도치 않은 형태로 해석될 때 느끼는 허무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한때 큰 나무가 되어주었으면 했던 어떤 존재가 오히려 나를 찌르는 못 박힌 장벽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절망감은 끝도 없이 깊어진다. 인간의 이직은 결국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그 '사람고리'의 탄성에 따른 것이다.


모든 것은 물리적 요건이 아니라 정서적 교감에서 비롯된다. 끝을 직감하는 것은 언제나 무언의 내적 교신으로부터다. 지난한 교신을 끝내고 모든 관계에서 홀가분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결국 오늘 울었다. 어쩌면 그리워진 걸 수도 있다. 복잡다단한 인간들이 모여사는 이 작은 우주에, 그래도 인연이라고 만나 지지고 볶았는데 헤어진 후 계속 생각나는 건 뭐 인지상정. 당연한 일이겠지. 아니면 내가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거라 치부해두자. 그냥 그런대로.  


떠나기 전엔 그렇게 떠나고 싶었는데, 떠나고 나니 이렇게 떠난 것이 아쉽다. 더 유연하게 봉합할 시간이 있었다면.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난 훨씬 후련했을까. 


새로운 동료들이 우는 내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실례가 또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또 어떤 누군가가 덜 그리워질 때까지 몰래몰래 조금 더 울어야겠다.


이런 이직. 지난 사람에게도 지금 사람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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