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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a Sep 22. 2017

제주 단상

존재한 시간들

제주도에 온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굉장히 많은 일이 일어난 듯 하지만, 곱씹어보면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다.

너무 편안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천만의 말씀. 오히려 생각보다 편안하지가 않아서 문제였다. 


"제주에서의 삶은 평온하니? 그래, 인생의 정답은 찾았고?"

간간이 안부를 묻는 친구들에게 난 그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제주도 마찬가지. 즐거웠던 내가 있고, 힘들어하는 내가 있고, 여전히 고민하고 갈팡질팡하는 내가 있다. 

다만 변한 건, 처음엔 몰랐던 이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새로운 내가 있다는 것이다. 


장소와 하는 일이 조금 달라졌을 뿐. 크게 변한 건 없다는 사실. 제주의 드넓은 초원과 맑은 바다, 땅 위에 촘촘히 박힌 숲의 풍경이 나에게 대단한 드라마가 되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 드라마가 되어줄 거라 믿었던 마음이 실은, 큰 착각이었다는 사실.


부정할 수 없는 이 사실들이 가끔 사람을 힘 빠지게 하기도 하지만, 또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건 그간 특별히 나빠질 일도 없었다는 얘기가 되므로 나름의 위안은 된다. 


제주에서의 1년을 책으로 써볼까, 했던 나의 포부도 시간 속에 무기력해졌고 이런저런 계획들은 별다를 것 없는 생활의 반복에 묻혀버렸다.

무엇을 쓸 만큼, 이 시간이 특별하다 여겨지지도 않았다. 다만, 특별할 거라고 믿고 싶었던 내가 있었을 뿐. 


힐링, 안식, 휴식 따위의 단어들은 그 쓰임이 '여행'일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 

제주가 '여행'에 머무를 때 제주스러움이 더욱 완벽히 빛나는 것처럼.


나는 1년 전, 이곳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고, 더 이상 제주를 휴식이나 안정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쁘거나 불행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설사 지상낙원이나 천국에 간다 해도 생활은 언제나, 영원한 생활일 것이므로. 그 생활의 무게는 어디에서나 견뎌야 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제주는 환상도 드라마도 뭣도 아니라고. 

책 쓰기에 대해 한 번 더 얘기하자면, 제주살이의 특별함을 늘어놓는 글들이 너무 많아, 그만 질려버린 탓도 있었다. 펜 끝으로야 은도 금이 되고 누더기도 비단이 되니까. 지나치는 돌부리 하나에도 근사한 스토리를 입힐 수 있는 게 펜의 위력 아닌가. 왠지 모르게 제주는 책의 세상에서 자꾸 그렇게만 포장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쓰다 보면 그렇게 될 것만 같아서, 더더욱 쓰고 싶지 않아졌다.


제주의 평온한 일상을 공유하는 글조차도, 특별하게 쓰이고 읽히는 아이러니가 나는 조금 불편하다. 


제주는, 그저 제주일 뿐이니까.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나이고, 어디에 있든 흔들리고 상처받고 치유하는 삶은 반복될 테니까.

엄청난 깨달음이나 마음의 안정 같은 거... 쳇 개나 줘버려. 

나는 도망쳤고, 그냥 사는 거다. 이 사실을 인정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제주가 조금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제주가 정말 특별해 보였더랬다.

그리고

제주에서는 사실, 서울이 더 특별해 보인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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