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a Mar 15. 2016

산책

그림자 하나, 그림자 둘.

마지막 눈이 내리던 날.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요즘 핫 트렌드라는 탄산수 한 병을 멋스럽게 들고선 '저녁의 한갓진 사색'이라는 허세 가득한 이름도 나 혼자 붙여보았다. 근사한 산책을 해보리라는 마음으로. 마치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오른쪽 길을 둘러보아도 왼쪽 길을 둘러보아도 쌍쌍의 무리뿐이었다. 어느 쪽으로 가도, 부부가 혹은 연인이 아니면 친구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즐겁게 길을 걷는 풍경만이 넉넉하게 펼쳐졌다. 눈이 내리고 어둠이 깔리고, 그 묵직한 융단 위를 나란히 걷는 둘의 그림자는 자체로 거리의 빛이 되는 듯했다. 


산책의 낭만은 자고로 혼자 사색하며 땅도 보고 하늘도 보고, 지나가는 길냥이와 눈도 마주치며 유유자적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혼자 걷는 일은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는 데에도, 복잡한 생각을 다스리는 데에도 늘 기막힌 특효약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혼자만의 산책은 그만의 독창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올해 마지막 눈이 내리던 날. 처음으로 둘의 걸음을 부러워해보았다. 가만 보자, 나도 저렇게 함께 길을 걸을만한 누군가가 있던가. 가족과 떨어져 지낸지도 오래고, 함께 서울생활을 버티던 동생도 먼 나라로 떠나버렸다. 나른한 휴일 저녁을 함께 보내줄 동지를 찾기엔 이미 결혼했거나 제각기 살기 바쁜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그 이전에, 혼자가 좋았던 나였다. 동생과 함께 지낼 땐 서로 의지가 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내 시간을 빼앗기는 거라 생각할 때가 더 많았고, 친구들과도 만나는 게 귀찮아지면 수시로 파투를 놓았다. 걷는 것도 물론이다. 혼자가 훨씬 편하고 좋았다. 함께 걸으면 버려야 할 나의 사색과 나의 시간과 나의 거리가 더 아까웠더랬다. 


365일 혼자가 참말 좋았던 나지만, 요즘 30일 정도는 혼자이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든다. 올해가 아직 다 가지도 않았으니, 다가오는 12월이 되면 30일이 아니라 100일, 150일로 늘어나 있을지도 모르지. 이것은 나에게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다.  


언젠가 서점에서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이고 싶지 않을 때'라는 카피의 책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런 마음은 응당 나만의 것이 아니겠지. 이렇게 책으로 적나라하게 카피되어 독자들에게 팔리는 것을 보면. 이런 '마음의 수'를 세상은 모조리 간파하고 있다는 뜻일 게다. 외로움이 트렌드가 되어버린 세상. (뭐야, 그럼 난 트렌드를 쫓고 있는 건가.) 





40분 정도 걸었을까. 산책을 하는 동안 탄산수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운동화는 눈에 젖어 발이 시렸다. 탄산수를 든 손도 시렸다.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고 사람들은 하나 둘 제집으로 돌아갔다. 산책로에는 나무 몇 그루와 가로등, 벤치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산책을 하면서 외롭다는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다. 외로움을 즐기려고 하는 산책인데, 외롭다고 자각해버리다니 말이다. 희한한 일이다. 



마침 오늘, 볕이 좋아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여전히 그림자는 하나다. 







매거진의 이전글 환풍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