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올드시티 중 하나인 서촌은 북촌과는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이 양반 사대부의 동네였다면,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서촌은 의관, 음악가, 화가 등 전문직 중인이 살았던 부촌이었어요. 조선시대에는 <인왕제색도>를 그린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가 서촌에 살았고,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의 예술가들이 서촌 주민들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의 발자취와 이웃 주민들의 손길, 소상공인들의 작은 상점들이 현재 서촌의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서촌은 사람 손으로 빚은 수공예 작품 같아요. 획일적이지 않은 개성과 취향이 드러나는 곳. 새로운 골목을 들어갈 때마다 어떤 풍경을 마주치게 될까 하는 호기심이 드는 곳. 이곳은 예측 불가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재미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라임색 담장 아래 구들장이 놓여있고, 초여름 햇살 아래 거봉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라에서 관리하기 어려운 좁은 골목임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고 정갈했습니다. 골목에 자리한 빗자루와 빨간 쓰레받기에서 골목을 깔끔하게 가꾸기 위한 주민들의 주인의식이 느껴졌습니다.
담장 앞에 자리 잡은 귀여운 오브제들이 골목길 여행자들을 다정하게 반겨줍니다.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골목이 떠올랐어요. 저희 집은 동네 사람들이 이용하는 장미 목욕탕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봄이 되면 할머니는 집 마당에 개나리를 잔뜩 심으셨어요. 흐드러지게 핀 샛노란 개나리가 우리 담장을 넘어 목욕탕에 오는 사람들을 반겨주곤 했습니다. 개나리가 예쁘다는 칭찬을 받으면, 할머니가 기분 좋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창성동 골목을 걷다가 귀여운 초인종을 만났습니다. 이 집에 세 가족이 모여서 살았던 흔적일까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셋방살이는 꽤 흔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한 집에 여러 가족들이 세를 들어 함께 살았습니다. 저희 집도 그랬습니다. 2층은 저희 가족이 쓰고, 1층은 여러 세입자 가족들이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함께 살았어요. 한 집에서 따로 또 같이 살아가던 정이 따뜻했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종로구 통의동 35-15번지에는 거대한 백송의 밑동이 있습니다. 백송은 흰 소나무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무의 껍질이 벗겨지며 흰 빛깔을 띄게 됩니다. 백자, 백호, 백송. 흰색을 사랑했던 선조들은 백송을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통의동의 백송은 한국에서 가장 크고 나이가 많은 백송으로 수형이 아름다워 196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백송은 오랫동안 이 지역의 수호신이었고, 그 상징성 덕분에 통의동은 한 때 백송동이라고 불리기도 했어요.
그러던 1990년 7월 17일 통의동 백송은 집중호우와 강풍으로 두 갈래로 갈라져 쓰러졌습니다. 국가공휴일에 경복궁과 청와대 근처에서 백송이 쓰러진 것은 큰 충격이었고, 대통령은 최선을 다해 백송을 살려내라고 지시합니다. 주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송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현재는 백송의 밑동 근처로 백송의 솔방울에서 태어난 백송의 아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백송터 바로 옆에는 브릭웰이라고 불리는 건물이 있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건물주가 바라는 점은 3가지였대요. 백송터와 어울리는 건물, 벽돌, 높은 층고가 그것이었습니다.
건물의 양 옆이 좁아서 건물 전체 형태를 온전하게 볼 수 없던터라, 건축가들은 건물의 형태보다는 외부와 내부의 연결성에 포커스를 맞추었습니다. 따라서 1층을 열린 공간으로 해서 양쪽 길을 백송까지 연결했고, 건물의 여백 공간을 백송터 방향으로 두었습니다.
벽돌도 다르게 활용했습니다. 벽돌을 3 등분하여 얇게 만들고, 강철관에 벽돌과 플라스틱 이격재를 한 장씩 꿰어 올리는 방식을 선택했어요. 마치 공예가가 구슬을 한알씩 꿰어서 목걸이를 만드는 것처럼요.
마지막으로 하늘이 시원하게 보이는 보이드 구조를 선택하고 중정을 두었습니다.
주변을 이해하는 디자인과 백송과의 관계를 살린 공간 경험이 거리의 가치를 높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하동에는 개성적인 산수화풍으로 한국 근현대 화단을 대표했던 한국화의 대가 청전(靑田) 이상범 가옥이 있습니다.
청천은 집을 누하동천이라 불렀습니다. 누하동의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 지역을 아끼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던 로컬 크리에이터였습니다.
가옥 뒤로는 큰 회화나무가 보입니다. 회화나무를 나타내는 한자는 괴(槐)인데, 나무 목(木)과 귀신 귀(鬼)를 합쳐서 만든 글자로 잡귀를 물리친다 해 집 주변이나 마을 입구에 많이 심었다고 해요.
회화나무는 높은 벼슬을 가진 학자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회화나무의 영어이름은 중국학자나무(Chinese Scholar Tree)인데요, 선조들은 회화나무가 학자가 되어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회화나무의 가지인 회초리를 들었다고 해요.
청천 이상범은 동아일보 미술 기자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신문에 실릴 삽화를 그리거나 보도 사진의 편집, 수정 업무를 담당하셨다고 해요. 1936년에는 마라톤 손기정의 사진에 찍힌 일장기를 지워 경찰에 구속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면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위 사진의 그림처럼 중국 전통화풍이 주류였대요. 청천은 중국화풍과 관념적 산수에서 벗어난 순간순간의 실경과 리얼리즘을 모색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의 왼쪽 수업기 작품을 보면 그 노력을 찾아볼 수 있어요.
보면 한국인지 알 수 있는 한국화가 그의 지향점이었습니다.
"어떤 것이 우리의 것인가라는 문제는 나로 하여금 우리의 습속과 전통과 풍경을 살피게 했고 그것을 어떻게 그림에 흡수시킬 것인가를 연구하게 하였다. 내가 우리나라의 언덕과 같은 느린 경사의 산과 초가집, 초부들을 발견하고 그러한 소재에 가장 어울리는 화법으로 미점법을 발견해 낸 것은 바로 이때였다."
한국만의 고유한 특성을 찾아, 담담한 색조와 담백한 기교로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표현한 그가 왜 한국화의 대가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