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체리는 만화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누구나 부러워할법한 예쁜 옷을 입고서, 사이좋은 친구들을 가진 체리. 신비하고 기묘한 힘을 가진 체리는 따라 할 수도 없을 것 같아서 멍하니 티비만 봤었다.
그다음으로는 후르츠 통조림 속 체리. 바나나맛 우유에서의 바나나가 향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통조림 속 체리는 분명 체리의 모양이고 체리의 맛이었지만 체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 주황빛의 이름 모를 과일 사이에서 새빨간 반쪽자리 체리를 발견하는 건 보물 찾기를 했을 때의 기쁨과 비슷했다.
뭐든 예쁜 게 좋은 나이가 있었다. 분홍색과 리본, 레이스를 좋아하며 세상의 온갖 사랑스러운 것들을 갖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문득, 체리가 먹고 싶었다. 통조림 속의 체리를 먹어본 것도 여러 번, 가끔 케이크 위에 올라가는 '진짜 과일' 같은 체리도 먹어밨으니 나름 체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체리를 먹는다면 그 달콤함과 싱그러움이 나의 것이 될 거라 믿었다.
과일만은 편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항상 과일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것질을 할 수 있거나 인스턴트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고기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먹을까 말까였으니 우리 집 식비의 삼분의 일 정도는 과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과일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체리가 나올 여름에는 참외, 포도, 수박 등 유난히 쟁쟁한 후보들이 많은 시절이었다. 몇 번을 조르고 졸라 체리는 간신히 그 대열에 끼일 수 있었다.
조형물 같던 체리를 장바구니에 담아 집에 데리고 오던 날 나는 괜히 입맛을 다셨다. 접시를 가득 채운 체리를 보았을 때는 사치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후르츠 통조림 속, 커다란 케이크 위의 가장 맛있는 체리를 잔뜩 먹을 수 있다는 건 피자의 맨 첫 부분이나 바싹 구운 만두의 끄트머리만을 먹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한 입에 쏙 넣은 체리의 맛은 충격적이었다. 새콤해, 텁텁해, 쌉쌀해! 못 먹으니만 못한 맛이었다. 신데렐라의 마법이 깨진 것처럼 구질구질한 현실을 마주한 것 같았다.
내가 먹은 건 다 달콤하고 맛있었는데! 엄마는 절규하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게 진짜 체리야. 차라리 가짜가 나았다. 가짜였더라면 이런 배신감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텁텁한 체리들을 씹으며 진짜가 마냥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날 것의 맛이었다. 방금 따온 것 같은 풋내도 났다. 싱싱하다는 긍정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먼, 덜 익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체리가 그런 맛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이상과 현실이 너무 달라서 홀로 분해했다.
얼마 전, 집에 가니 체리가 있었다. 냉장고 구석에 자리 잡은 걸 보고도 수박이나 산딸기처럼 꺼내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밥을 먹고서 엄마가 내밀어준 그릇에는 체리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색이었다. 언니가 체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역시 나와는 정반대이다.
예전처럼, 체리를 한 입에 넣었다. 이번에는 텁텁함보다 새콤함이 강했다. 냉장고에 있다가 나왔는데도 차갑지 않았다. 조금 더 과일 같았다. 딱딱한 겉을 깨물면 파삭, 하고 터지는 게 좋았다. 씨를 둘러싸고 둥그렇게 파먹었다.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언니가 오기 전에 혼자서 그 많던 체리를 다 먹어버렸다. 진짜의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