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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Feb 14. 2022

겨울이 끝났다

얼른 겨울이 끝났으면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을 겨울이 끝났다. 시험이 끝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아침 공기를 쐐었을 때 공기는 유난히 포근했다. 뺨에 닿는 바람이 차갑지도 않았고 어딘가 외로운 기분도 들지 않았다. 이런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봄을 실은 공기는 들이쉬기만 해도 마음에서 새싹이 자라는 기분이다.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봄이 오는 기간은 무엇보다 설렌다.


시험을 준비했었다. 난 언제나 즉흥적이고 재미를 추구하지만 내 인생 계획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가야 할 곳은 정해놔야만 했다. 그곳에 가기 위한 단계들이 있다면 그것들도 중간중간 끼워 넣었다. 재미는 그 사이에 여유가 있을 때 추구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내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설계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계획이 조금씩 틀어져도 궁극적으로 갈구하던 건 같았다.


교환학생을 줄곧 가고 싶었다. 사실 교환학생에 대해 개인적인 동기로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난 둘째였고 비슷한 길을 먼저 걸어가고 있는 언니가 있었다. 2년 차이라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간격 아래에서 나는 언니의 인생을 참고하며 내 인생을 설계할 수 있었다. 아이는 부모의 그림자를 보고 자란다지만 실질적으로 쫓을 수 있는 건 형제자매의 그림자다. 난 언니의 그림자를 보며 따라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했다.


언니는 멀쩡한 인생을, 가끔은 타인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고 난 그걸 따랐다. 언니가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계기와 고민은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겐 그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결과만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난 언니가 왜 외고에 가고 싶었는지, 왜 우리 학교에 원서를 썼는지, 왜 교환학생을 갔는지 완전히 알 수 없다. 난 그저 언니를 따랐다. 언니는 외고에 가고 싶어 했다. 엄마 아빠는 좋아했다. 모두들 '외고'라는 단어에 열광했다. 나도 외고를 가고 싶어졌다. 아주 짧았지만 그랬다.


난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우리 학교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우리 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언니가 우리 학교에 먼저 들어갔기 때문이다. 언니는 학교에 만족했다. 학교가 얼마나 좋은지, 마스코트는 얼마나 귀여운지, 교수님들은 얼마나 좋은지 자랑하고 싶어 했다. 나도 어느 순간 우리 학교가 좋아졌다. 알아보니 내가 관심 있는 학과가 있었고, 그 이후로 나의 목표는 우리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 학교에서 열린 캠프에 참여하며 이곳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재수 끝에, 난 합격할 수 있었다. 학교 생활은 나에게도 만족스러웠다. 학과나 진로에 대한 고민은 끊이질 않았지만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재밌는 학과 생활을 했다. 내가 잘 고른 길이었다.


언니는 대학교 3학년 때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그때의 나는 재수를 하던 시절이었고 언니랑 연락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때때로 연락한 언니는 행복해했고 즐거워했다. 언니의 행복은 거기에 있었다. 수능이 끝나고 나서 언니를 찾아갔다. 3박 4일간의 여행은 재밌었다.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편안했다. 내가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하고 싶은 것도 잔뜩 할 수 있었다. 대학에 가면 언니처럼 교환학생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유럽이나 일본으로 가고 싶었다. 유럽에서 오랫동안 지내보는 게 나의 로망이었고 일본에서 공부를 한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았다. 어딜 가도 좋았다. 그러던 중 중국어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알아서 공부를 하고 시험을 쳤다. 실력이 늘기 위해서 과외도 알아보고 전화 중국어도 하고 학원도 다녔다. 그 과정들이 지겹다고 생각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부할수록 더 알고 싶어졌다. 교환학생은 중국으로 가고 싶었다. 중국어는 아무리 공부해도 어려웠고, 중국에서 살아보면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영어보다는 중국어가 재밌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반대했다. 주위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든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중국이나 일본 말고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유럽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내가 중국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면 그런 의견들에 굴하지 않았을 텐데, 단 한 번도 가지 못한 유럽은 로망 덩어리였다. 그 나라가 실제로 어떤 문화를 가졌는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가고 싶었다. 낭만으로만 가득 차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을 때가 분명히 있다. 내 마음 30%, 부모님의 강요 70%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가 재밌어지는 시기를 기다리다 보니 늦어진 감은 없지 않아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단순히 도망가려 한다고 생각했다. 영어가 하기 싫어서 중국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냐고. 중국으로 교환을 가는 건 시간 낭비라고도 얘기했다. 어쩌면 보여주기 식으로 공부를 했다. 난 도망가는 게 아니라고. 


혹시 몰라 토플은 두 번 접수했고 두 번의 시험은 모두 끝났다. 모의고사보다 훨씬 못 미치는 점수였다. 심지어 먼저 나온 점수는 지원이 불가능한 점수였다. 엄마 아빠는 또 날 몰아세웠다. 자신들이 담아놨던 말을 뱉었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날린 게 속상하다', '안타까워서 그런다'라는 말도 안 되는 감옥 아래 자신들이 했던 말을 정당화하려 들었다. 그건 그저 최소한의 방패였을 뿐이다. 누가 봐도 허접한 방패 하나를 세워두고는 그 뒤에서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해댔다.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부모는 언제 완전히 성장하는 걸까? 나는 스물두 살에 너를 위해서, 라는 말 아래의 말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았는데. 오랜만에 아주 깊이 상처받았다. 나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속상한 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예상했던 점수보다 낮게 나와서? 유럽을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글쎄. 이쯤 되니 애초에 교환을 가고 싶었던 계기가 제대로 존재했나 싶었다. 언니는 왜 교환학생을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가야겠다고 결심한 걸까. 난 누군가의 그림자나 결과 아래에서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최초에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은 매번 2년 전에 정해져 있었다.


난 인생에 실패하지 않았다. 어디에 교환을 가더라도 잘 살 것이다.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건 있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왜 난 중국이나 일본으로 교환을 가야 하는 게 비참해졌을까? 둘 다 내가 좋아하는 나라다. 언젠가 나중에, 돈이 모인다면 꼭 살아보고 싶은 나라들이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온전한 나의 결정을 하고 싶었다. 그들은 내가 아니다. 나는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애매하게 발목이 잡혀 어디로도 떠날 수 없었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 생리가 터졌다. 배란통부터 심상치 않더니 어제는 하루 종일 누워만 있어야 했다. 아프고 서러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그 안에서 나를 죽였다. 공기를 맞았을 때 겨울은 오래전에 지나있었다. 이번 겨울은 짧았고 길었다. 노력하기엔 짧은 시간이었고 견디기엔 길었다. 너무 오랜만에 아파서 멀리, 아주 멀리 떠나고 싶었다. 창원으로 돌아오고 싶어 발버둥 친 가을의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매 순간을 필사적으로 살아가는데 그 속의 나는 언제나 이해되는 건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고 바보 같고, 오히려 그때의 내가 부러울 때가 있었다.


이젠 너무 피곤했다. 무언가를 찾고 생각해내는 일이 힘들었다. 어떻게 쉬어야 내가 괜찮아질지도 몰랐다. 이제 봄은 오는데,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쉬는 것도 지쳤다. 생리 때문에 그런 걸까? 호르몬 때문에 내가 이상해지는 걸까? 좋아하는 일을 해도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다. 겨울은 끝났는데 여전히 따뜻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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