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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Apr 06. 2022

관현악실이 없어졌다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소음

나는 내가 영원히 10 대일 줄만 알았다. 머리로는 다음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 10대는 너무나 길었고 고통스러웠고 즐거웠다. 어른들은 이 시절이 평생 그리울 거라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이 다가오면 심장소리가 들릴만큼 크게 뛴다다는 말을 읽고 그 사실을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속성처럼 생각해온 것처럼, 그저 그러려니 생각했다.


지금의 내가 그렇게 여기지 않더라도 미래의 내가 그렇게 여기겠지, 하면서. 아무래도 그때는 미래를 그리기가 힘들었다. 매번 말하는 장래희망, 미래의, 10년 후의, 이런 대책 없고 근거 없는 말들을 들으면서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장 애매한 게 중학생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그나마 철도 좀 들었고, 대학이라는 미래가 선명하게 제시되어있었는데 중학생 때는 그러지 않았다. 뭐든 다 불투명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것들이나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여과 없이 드러냈고 그건 다시 칼날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당연한 대가였지만 나에게는 저주였다. 그래도 중학생 시절을 꿋꿋하게 살아나갔던 건, 관현악부 때문이었다. 관현악부에서 좋았던 기억은 30% 정도인 것 같은데 그래도 그게 없었으면 중학생 시절을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 관현악부가 거의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관현악부는 나의 중학교 시절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지금 생각하기엔 쪽팔릴만한 행동들을 너무 많이 해서 자주 돌이켜보지는 않는다. 게다가 관현악부 중 친구라고 부를 사람도 남아있지 않다. 내 전부가 거기 있었고, 나는 전부 놓치고 놓아버렸다.


나는 플룻으로 오디션을 봤지만 나와 같이 본 친구는-나보다 늦게 시작한 친구였다-붙었고 나는 떨어졌다. 나는 들어보지도 못한 호른이라는 파트에 가게 됐다. 아마 2 지망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짝 선배와 함께 즐거운 중학교 1학년을 보냈다. 호른은 긴 관을 둘둘 말아놓은 모양의 악기인데 트럼펫이나 트럼본과 달리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도 처음 보고 당황스러웠다. 사실 선생님이 호른으로 가라고 얘기했을 때도, 호른이 어떤 악기인지 몰라서 헤맸던 기억이 있다.




호른은 내 기준에서 금관 중에 가장 매력적인 악기이다. 관현악부 내에서 트럼펫은 시끄러웠고, 트럼본은 어질어질했다면 호른은 고요했다. 거짓말 같겠지만 그렇다. 호른은 다른 금관에 비해 소리가 크지 않고 맑고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오케스트라 곡을 들을 때 묵직한 관악기 소리지만 맑은 소리가 들려온다면 십중팔구 호른이다. 트럼펫과 트럼본은 당연히 주목받았고, 튜바는 악기가 비교적 커서 주목을 받았다. 호른은 가장 눈에 띄지 않지만 의외로 솔로 파트가 많은 편이다. 연말~연초에는 홀을 빌려서 정기연주회를 했었는데 그때마다 촬영을 해서 DVD로 제작을 했다. 호른의 솔로 파트임에도 호른을 찾지 못해서 다른 악기를 찍고 있는 경우도 참 많았다. 그럴 때면 괜히 관계자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네! 하면서.



관현악부는 남들보다 빨리 등교하고, 남들보다 빨리 밥을 먹는다. 교실에 가방을 두고 가거나 혹은 바로 관현악실로 간다. 8시까지 등교지만 늦게 오는 애들도 적지 않았다. 일찍 도착하면 선배들의 악기를 세팅한다. 내 악기를 꺼내는 건 가장 마지막의 일이다. 트럼본 자리 뒤편 서랍장에 호른 케이스들이 있다. 그곳에서 선배들의 악기를 차례대로 꺼내서 자리에 가져다 둔다. 그게 1학년의 일이었다. 군기라고 생각하려면 군기겠지만 난 싫지 않았다. 선배들의 악기를 만져볼 수 있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나는 호른을 지독하게 못했다. 나는 재능이 없는 것과 있는 건 0과 70 정도로 나뉘는데 음악과 체육은 0이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마이너스에 더 가깝다. 중학교 1학년, 자아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나의 무능함을 기반으로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레슨 선생님이 그랬다. 졸업하자마자 선생님의 번호는 차단해버렸을 정도다. 못한다고 혼나, 이래도 못해, 저래도 못해. 못하고 한심하고 재능 없고 당장 그만뒀으면 좋겠는. 그런 분위기를 항상 만들었다. 하지만 난 노력하고 싶었고 내 선배들은 나에게 너무나 자상했다. 나도, 언젠가 선배들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싶었다.




방과 후면 항상 내 짝 선배와 클라 선배, 가끔 타악기 선배랑 같이 놀았다. 학교를 마치면 매번 같이 놀았다. 그래서 1학년 때는 외롭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같이 안 놀게 됐는데 계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매일 놀 때는 정말 재밌었다. 관현악부에는 날 예뻐해 주는 3학년 선배들도 참 많았다. 그래서 나는 레슨 시간은 조용히 견디고, 견뎠다. 가끔 울고 싶어지는 날도 있었지만 견뎠다. 1학년 정기연주회 때는 무려 높은 미까지 낼 수 있었다.




호른은 항상 어려웠다. 호른은 키가 세 개밖에 없는데 키 세 개로 세 옥타브를 낼 수 있었다. 다른 악기를 하는 선배들이 가끔 찾아와서 이거 세 개로 세 옥타브가 난다고? 하고 몇 번이나 물었다. 나도 가끔 놀라웠다. 키가 세 개밖에 없어서 운지가 겹치는 것들이 많았다. 거기서 다른 음을 내는 방법은 그저 부는 힘을 다르게 하는 것뿐이다. 호른은 가장 어려운 악기라고, 레슨 선생님은 항상 자부심이 강했다. 내가 이전에 배웠던 플룻은 가장 쉬운 악기라서 선생님이 자부심이 있었는데 여긴 달랐다. 가끔 그 괴리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내가 2학년이 되고, 지휘자 선생님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호른의 솔로 파트가 많고 희귀하고 어려운 곡들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1학년 때는 반주 같은 느낌이었는데 순식간에 메인이 됐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은 2학년이 되면서 악기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학년이 높을수록 좋은 악기를 썼는데 내가 쓰던 건 제일 안 좋은 악기였다. 악기 덕분인지 실력 덕분인지 전보다는 훨씬 잘하게 됐다.



관현악부 안에서 2학년 때는 행복한 일 투성이었다. 그나마 있는 어려움은 열쇠에 대한 문제였다. 관현악부에는 '열쇠'라는 직책이 따로 있었다. 누구보다 빨리 학교에 와서 관현악실 문을 열고, 아침 연습이 끝나면 문을 잠그는 사람이었다. 내 짝 선배가 원래 열쇠였고, 그다음은 내가 했다.



짜증 나는 건 우리 학년 남자애들이었는데 걔네는 아침에는 늦게 오면서 마치고 나면 더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일찍 와서 연습하고 가면 될 텐데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문제 말고도 큰 이유 없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애들이 있었다. 나는 안타깝게도 앞 뒤가 꽉 막힌 사람이었고 그때는 훨씬 심했다. 융통성 같은 건 하나도 없어서 그런 애들과 부딪힐수록 머리만 아팠다.



그리고 3학년이 됐다. 내가 아꼈던 후배에게 열쇠를 물려줬다. 3학년 때는 1, 2학년 때보다 대중적인 곡들이 많았다. 그래서 연습이 조금 더 즐거웠다. 듣도 보도 못해서 유튜브에 검색해도 제대로 된 합주곡도 안 나오는 곡을 대회 곡으로 연습하기도 했지만, 그것만 빼면 좋았다. 더 좋은 악기를 썼지만 실력은 2학기가 되어서야 조금 나아졌다.




호른은 침을 많이 빼는 악기다. 우리는 관 안에 침이 고이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침을 빼줘야 했다. 그래서 우리의 보면대 밑에는 침을 빼는 수건이 있었는데 앞자리에 앉아있던 플룻 파트 애들은 그걸 보면 질색하곤 했다. 우리도 딱히 깨끗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더러운 취급을 받으면 종종 화나곤 했다. 침을 빼지 않으면 악기 소리가 맑지 않다. 다행히 침을 빼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는 구분하기 쉬웠다. 악기를 불면 투투 투투, 하는 찝찝한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관을 빼서 침을 버리면 됐다.



호른을 불 때는 오른쪽 허벅지 위에 나팔 부분이 위치하게 올려둔다. 왼쪽 손으로 운지를 하고, 오른쪽 손은 나팔 안쪽에 살짝 자리 잡는다. 쉴 때는 악기를 피스와 나팔이 가로로 일자가 되도록 안는다. 꼭 끌어안는 모양새다. 앉아있을 때면 손을 어디로 둘지 모르는 나는 향할 곳이 있는 호른이 좋았다. 관현악실에서는 자는 애들도 많다. 합주할 때가 아니면 관현악실은 말도 못 하게 시끄럽다. 귀가 저릿저릿하지만 그 소음에도 익숙해지면 그 안에서 대화도 하고 장난도 치고 잠도 잔다. 일관성은 하나도 없는 소음 사이에서 잠은 잘 온다. 악기에게 이래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호른을 끌어안고 그 위에 엎드린 적이 너무 많다.




새 악보가 나오면 파트장이 악보를 받아온다. 호른은 퍼스트, 세컨드, 써드, 포드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퍼스트와 세컨드는 각각 한 명, 써드와 포드는 각각 두 명이다. 각자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악보를 받는다. 나는 음치면서 박치였기 때문에 새 악보가 나오거나 연습이 막히면 집으로 악보를 가져갔다. 그리고 유튜브에 곡을 검색하고 악보를 보며 박자를 맞췄다. 연습을 하고 싶으면 마우스피스만 가져가서 집에서 연습을 했다. 1학년 때는 가끔 호른을 가져가서 연습한 적도 있었는데 무거운 데다 크기도 크고-애들은 007 가방이라고 불렀다-크기도 너무 커서 민폐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로 입학식, 여름캠프, 대회, 정기연주회를 거쳤다. 입학식에서는 매번 하던 교가와 애국가, 라데츠키 행진곡 정도를 한다. 여름캠프는 대회를 위해서 2박 3일로 떠난다. 말이 캠프지 반쯤은 놀러 간다. 대회에서는 2곡을 연주한다. 우리는 언제나 도 1등이었다. 정기연주회는 지역의 아트센터 홀을 빌려서 진행했다. 한 학기 동안 많은 곡을 하지는 않는다. 1학기에는 주로 대회 곡을 연습한다. 가끔 가다 한 곡 정도를 더하는데, 그것도 대회 곡 때문에 금방 흐지부지해진다. 대회 곡의 난이도가 절대 낮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솔로 파트가 꼭 끼여있는데 순조롭게 넘어간 적은 별로 없다.



대회가 끝나면 그때부터 연주회를 준비한다. 연말~연초에 있을 연주회는 곡이 정말 많다. 너무 많아서 정신이 아득해진다. 연말쯤 되면 시험도 다 끝나고 한가한 주간이 생기기 때문에 더 열심히 연습을 한다. 주말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 재밌는 곡들도 있고 재미없는 곡들도 있고. 예를 들어 베토벤의 운명 2악장에서 호른은 별로 파트가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2악장 합주를 할 때면 가끔 졸았다. 트럼본은 더했다. 3악장까지 파트가 없었다. 쟤네보다는 우리가 낫다는 말을 했다.




졸업하고 나서도, 그 뒤로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계속 그때의 곡들을 듣고 있다. 그 시절을 추억하는 건 어렵지 않다. 몰다우에서도, 베토벤 운명 4악장에서도, 캐리비안 해적에서도, 사치모와 슈퍼맨과 시인과 농부, 세빌리아의 이발사, 그리스, 시카고, 핀란디아, 오페라의 유령, 이 노래들을 듣는 순간 떠올릴 수 있다. 노래를 들으면 합주를 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상상 속의 악기를 들고, 손을 움직이고 리듬을 따라간다. 어느 파트에서 나와야 하는지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관현악실을 공사했다. 소리를 흡수한다는 스펀지도 다 찢겨나가고 바닥에 깔아놓은 깔판들은 다 제각각일 정도라 여름방학 동안 새로 리모델링을 했다. 리모델링을 하기 위해서 다 같이 대청소도 했었다. 낡아빠진 관현악실이 사라지는 것도 서러워서 몇 번이나 사진을 찍었다. 리모델링을 하고 나서는 밖에 멋있는 간판 같은 것도 달았다. 다들 웃기다고 했지만 그래도 한 번씩 사진을 찍었다. 정말 많이 좋아했다. 그곳의 소음도, 공기도, 전부.



이제 그것도 10년이 다되었고, 관현악실은 없어졌다고 한다. 난 아직도 그 시절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면 그때 그 풍경이 다시 펼쳐질 것만 같은데 죽을 때까지 볼 수 없다는 게 서럽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졸업 후 한 번이라도 관현악실에 가볼 걸 그랬다. 한 번이라도 호른을 다시 안아볼 걸 그랬다. 고등학생의 난 여전히 어렸고, 학교에서 밀어주는 관현악부는 영원한 줄로만 알았다. 번영이 있으면 쇠퇴도 있는 법인데.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너무 오랫동안 외면해왔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영원히 사라지고 추억 속에서만 간신히 꺼내볼 수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앞으로 이런 감각을 얼마나 더 느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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