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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Nov 08. 2020

사람을 만난다는 건

세상은 넓고, 나쁜 사람도 많고 미친 사람도 많지만 좋은 사람은 더 많다

‘너는 나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지. 눈도 마주치지 않았던 것은 분명 교실이 너무 넓어서,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을 거야.’       


내가 좋아하는 순정만화 ‘호리미야’의 대사 중 일부분이다. 요새 들어 더 생각나는 말들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와 몇 시간이나 즐겁게 대화하고 혹은 같이 밤을 지새운 요새.          




사람은 대체적으로 변한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생각은 깊어지고 범위는 넓어진다.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어느 날 문득 이해하기도 한다. 이 대사가 그랬다.               



아마 고등학생의 나였다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다.               








나는 관계에 매여있는 사람이었다. 분명 관계를 만드는 건 나를 위해 있는 게 틀림없는데 관계가 나를 옭아맸다. 그 명목상의 관계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사람을 장기짝처럼 분류하고 나누고, 내가 관계를 이루지 못하는 게 싫어서 모든 것을 계산하며 살았다. 그런 삶은 치열하기보다는 칙칙한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찝찝했다. 개운하지 못하고 어딘가가 항상 불안했다.          



나는 혼자인 게 싫었다. 누군가와 어울리지 못하는 게 싫었다. 겉도는 느낌이 선명한 게 소름 끼쳤다. 그때는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벌을 받는지도 모른다고 괴로워했었다. 어디에 있든 불순물인 것 같은 게 너무 싫고 수치스러웠다.          



이제야 생각해보면 그저 운이 안 좋았다. 여자애가 열 명 정도밖에 없는 교실이니 나와 맞는 애가 당연히 없을 수도 있었다. 중학교 때는 좀 더 나았다. 반 전체가 여자애들이어서 그중에는 꼭 한 두 명 정도는 잘 맞는 애들이 있었다.  그래도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애들 중에는 사이가 좋은 애들이 별로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고서 더 다양한 곳에서 애들이 모여들었다. 교실에는 모르는 애들만이 가득했다. 그 어색한 공기가 나의 어색함도 숨겨줘서 좋았다. 깨끗한 벽지에 얼룩이 있으면 눈에 띄지만 더러운 벽지 위에는 다 비슷하게 보이는 것처럼.               




고등학생 때도 항상 좋은 관계들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잘 지냈다. 졸업할 때쯤, 그리고 졸업하고 나서 내 주위에 남은 애들은 거의 다른 초중학교 출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저 맞지 않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더 많았을 뿐이었다.               




나는 ‘대학’이 너무 좋았다. 대학에는 더 다양한 곳에서 모인 친구들이 있었고, 더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1학년 때의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교양 시간에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걸어 친구가 됐다. 강의를 혼자 듣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부끄러움이나 쑥스러움보다 훨씬 더 컸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용감한 1학년이었다.           




그렇게 알게 된 두 사람은 너무나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다. 한 명은 너무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어서 몇 번이나 따로 만나서 놀았다. 털털한 성격에 언니, 하며 웃는 모습은 언제 떠올려도 즐겁다. 또 다른 한 명은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다. 언니는 조곤조곤하지만 할 말은 다하고, 솔직한 면모도 많아서 좋았다.          



그 두 사람 말고도 나는 너무 좋은 과 친구들을 만났고, 동아리 사람들을 만났다. 이전까지 있었던 셀 수 없는 관계의 불행이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완벽했다.               





제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친구들과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려 보곤 한다. 아마 공부를 꽤 잘했을 테고, 학종(학생부 종합전형)으로 온 애들이 대부분이니 학창 시절 내내 반장을 도맡아 했겠지. 과연 우리가 고등학생 때 만나도 이렇게 친해질 수 있었을까?          




고등학생과 대학생 사이의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아마 몇 년만 빨리 만났다면 친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은 과제든 수업이든, 우연히 알게 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전혀 친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과도 어떻게든 얽혀서 단둘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랑 맞을 것 같은 사람도 있고 맞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놀라운 건 대체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게 되는 사람들 중에서 나와 크게 엇나가는 사람이 없다. 10분만 이야기해도 금방 좋은 점이 보인다. 2년이라고 하기엔 미묘하지만, 어쨌든 2년 정도의 대학생활에서 나는 그런 경우를 꽤 많이 겪었다.           




예전만 해도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일 거라 생각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몽땅 이상하거나 아니면, 내가 이상하거나. 어쨌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깊이의 관계들을 더 많이, 훨씬 더 많이 겪으면서 생각이 변했다.           





그저 여태껏 친해지지 못한 사람들은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나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들은 시기가 맞지 않아서, 상황이 맞지 않아서이다. 교실이 너무 넓었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에게까지 오기 전에 이미 좋은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서 굳이 오지 않은 것이다.               




이제 나는 그걸 알았으니까 예전만큼 상처 받지 않고 예전만큼 예민하지 않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두려움이 아니라 신나는 기분이다. 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사람'에게는 색이 있다. 그 색은 파레트에 짜인 선명한 물감처럼 하나의 색만을 확실히 가지고 있지는 않다. 성격과 표정, 버릇, 목소리 등 모든 것들이 섞여 색을 만들어낸다. 그 색은 무한대이기 때문에 아마 나는 세상의 사람들 중 20% 정도밖에 못 만났을 것이다. 



전혀 만나지 못한 색을 가진 이들을 어서 빨리 만나고 싶다. 그들에게 나는 또 어떤 색으로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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