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끼치게 좋으면서도 미칠 듯이 좋은
뭐든 그렇든 가장 끔찍한 것에서도 일말의 희망이라는 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미역국 같은 것.
이 문장을 읽으면서 다들 자신만의 경험을 떠올렸을 텐데 미역국이라니, 정말 뜬금없게 느껴질 거다.
나는 내 기억의 첫 자락부터 지금까지 프로편식러였다. 좋아하는 것도 많지만 싫어하는 것도 많은데 그중 가장 싫어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단연코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미역이다.
단어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실례이지만 이름부터가 싫다. 미역. 미끌미끌한 초록색 덩어리가 떠오른다.
미역을 마지막으로 입에 담았던 건 유치원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급식을 먹고 있는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어른이 되면 미역을 잘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른이라면 분명 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특이한 곳에서 어른이 된 나를 상상을 했었다. 어느 식당에 앉아서 미역국을 퍼먹고 있는 20대쯤의 나는 기이하게 느껴졌다. 이상이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면, 이상적인 어른의 조건은 미역도 먹을 수 있는 어른이었다.
물론 20대가 된 지금도 미역은 전혀 먹지 못한다. 자매품인 파래도 먹지 못한다.
다들 편식은 음식을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에게 해조류 친구들은 '못' 먹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못 먹는다. 진짜 못 먹는다. 미역을 먹을 바에는 10일을 굶는 게 낫다.
극복이나 노력 같은 단어를 지긋지긋하게 좋아하지만 편식에 있어서는 죽어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런 내가 왜 굳이 싫은 음식에 대해 줄줄이 나열하고 있는가 하면, 더 기이하게도 나는 미역국을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냐면 2주내내 아침으로 미역국을 먹었다. 내 미역국은 남들과는 다르다. 황녹빛 국물에 손톱만한 미역 하나 없이 조개 살덩어리나 새우가 둥둥 떠다닌다. 거기에 밥을 말아먹고 가는 걸 나는 제일 좋아했다.
나는 미역을 싫어하고 그 국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미역 없이 미역국을 먹는 걸 굉장히 당연하게 여겼다. 오히려 미역이 잔뜩 들어있는 국에 밥을 말아 서슴없이 퍼먹는 이들이 더 신기했다. 가끔 학교 급식에서는 미역국이 나오기도 했는데-어느 학교나 마찬가지로 우리 학교는 급식이 맛이 없었다-그때마다 나는 국만 열심히 먹었다.
그걸 보고 친구 한 명이 열심히 웃었다. 미역을 안 먹고 국물만 먹는 게 웃기다고 했다. 그걸 웃기다고 생각하는 게 웃겼다. 그때가 별 것도 아닌 걸로 웃을 때여서 그랬나, 싶었는데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식당에서 국물만 먹는 나를 보고 다른 친구도 웃었다. 건더기만 남아서 바짝 말라가는 게 웃기다고 했다. 아직도 뭐가 웃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밖에 나가서는 미역국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가끔 파래로 끓인 국-이것도 미역국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있어서 당황했다. 이건 냄새도 못 맡는다-이 있기도 하고, 새알이 들어간 미역국도 싫어하고-국물이 끈적끈적해진다-고기가 들어간 미역국도 싫어한다. 그러니까 미역국을 좋아한다고 했다가 내가 건더기를 전혀 먹지 않는 것을 상대가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어서이다. 내가 까다로워하는 음식에 대해서는 좋아한다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비슷한 이유로 굳이 생일 때도 미역국을 먹지 않는다. 누군가의 생일에는 미역국을 몰래 끓여줘서 갖다줄까는 발상을 할 정도로 한국식에 물들여져 있지만 이상하게 내 생일에는 치킨이라면 몰라도 미역국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생일에 미역국을 먹은 적이 있었던가. 아주 어릴 적 말고는 없었던 것 같다.
항상 생일을 피해서만 미역국을 먹는다. 생일 때는 가장 좋아하는 걸 먹는데 한 번도 미역국이 생각난 적은 없다. 좋아한다고 했지만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다 보니 이상한 조합이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건더기와 제일 좋아하는 국물이라니. 애증의 관계인 걸까. 미역국이라는 단어가 의문스러우면서도 내심 기대가 되는 건 싫지 않기 때문일 거다. 제일 싫어하는 것보다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서 다행인 걸까? 아니면 제일 싫어하는 것에서도 좋아하는 부분을 발견하게 돼서 기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