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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Dec 27. 2020

스물두 살이나 먹고서

어쩌면 항상 살얼음판 위였다


"갑자기 왜 이래?"


내가 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세상에 갑자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인과관계가 있길 마련이고, 어떠한 운이나 우연조차 '이유'가 있다. 


특히 감정에서는 더더욱. 잔잔하게 한 두 개씩 나를 건드릴 때에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되새기며 넘긴다. 숨을 고르며 차분하게. 화를 내봤자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 저 사람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언성만 높아질 것이다. 내 기분만 좆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도를 지나칠 때가 있다. 그러면 누군가가 얼음이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싸해진다. 본인이 싸하게 만들면서 눈치를 채지 못할 때, 분명 수많은 책들을 읽고 수많은 분노를 접해봤음에도 불구하고 좆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스물두 살, 스물네 살이나 먹고 수저 하나 자리에 안 두는 게, 과일 하나 깎아서 내오지 않는 게, 하는 것도 없으면서 돕지는 못할 망정......



어쩜 저렇게 말씨 하나하나가 다 날 화나게 하는지. 분명 내 인생 개척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지짐 돌인 게 틀림없다. 후에 나는 고요하게 화를 냈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먹어서 이모양 이꼬라지네.


그 사이 기분이 풀린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인성이 좆같아서 내 인성도 좆같다는 얘길 했는데 도저히 알아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스물두 살의 그는 군대에 있었다. 스물네 살의 그는 취직 준비로 열을 올렸다. 오십 두 살의 그는 아직도 친가에 가면 누워서 잠을 자고 엄마와 할머니가 차리는 밥을 먹고, 과일을 먹는다. 가끔 나와 언니를 들먹이며 가서 수저도 놓고 과일도 내오라는 소리를 한다. 자신이 남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은 행위를 세상에서 무엇보다 귀중한 딸들에게는 빼먹지 않고 시킨다. 



딸들이 엄마를 애처롭게 여기는 사실이 난 너무 싫다. 나 역시 엄마가 애처롭다. 항상 남을 함부로 동정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지만, 나는 항상 엄마가 슬프다. 그게 지긋지긋하고 싫다. 엄마가 불행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내가 안타까움과 미안함에서 엄마를 돕는 건, 엄마가 할머니를 돕는 것과 같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는 일 년에 몇 번씩이나 제사상을 차리면서 매번 혼자서는 못할 일을 하신다. 말려도 듣지 않는 할머니를 엄마는 안타깝게 여겨서 또 돕는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안타깝게 여기지도 않는데.





그와 결혼한 건 엄마이고 난 부속물에 불과하다. 엄마 남편이니까 좀 알아서 해. 자주 하는 말이다. 그를 선택한 건 엄마인데 왜 그 책임을 나까지 뒤집어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말 그대로 '돈'을 대주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을 걱정하지 않고 다닐 수 있는 비용부터 내가 입는 것, 먹는 것, 모두. 


나는 언제나 참고 있다. 무례하고 가부장적인 그를 참는다. 마냥 그를 싫어할 수 없어서 더 화가 난다. 그는 나를 꾸준하고 지독하게 사랑해준다. 나와 언니를 얻은 게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한다. 얼음판은 신이 난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계속 걸어야 한다. 한 번 깨지면 몸이 얼듯이 차갑고 걷는 게 두렵다. 하지만 우리의 길은 얼음판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애틋해지기 위해서 떠날 거다. 가족은 가끔 봐야 애틋하고 멀어질수록 더 애틋하다. 자주 보면 불쾌하고 가까워지면 화가 나는, 엄연한 타인이다. 가족이라는 건 멀리서 봐야 희극이지 가까이서는 지긋지긋한 비극일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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