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에이드

권리를 찾게 해주는 달콤한 맛

by 한열음




바쁘고도 평온한 6월, 우리 학교는 평화롭지 못했다. 작년 총학생회가 노숙 시위를 하며 따낸 총장직선제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이 돈을 내고 다니는 학교에 학생의 의견이 들어가지 않는다니, 이만큼 모순되는 일도 없다. 1차 투표에서 후보자가 과반수 이상의 득표율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2차 투표를 진행하게 되었다. 2차 투표에서 우리의 표를 개표하기 위해서는 재학생의 40퍼센트인 3천 명이 투표에 참여해야만 했다.



투표는 오로지 대면, 투표 기간은 안타깝게도 시험기간이었고 수도권에 있는 학교에는 지방에 사는 학생들의 비율도 적지 않았다.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표를 개표하지도 못한다면 그 노력이 의미가 있겠냐고, 모두들 투표를 독려했다.



1차 투표는 시험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2차 투표는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명을 했었고, 우리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교수들과 천막에서 시간을 보낸 총학생회를 기억하고 있었다. 총장직선제는 우리가 얻어낸 승리였으며, 노력의 결과였고, 마땅히 쟁취해야 하는 권리였다.



언니와 이야기해 바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때에도 코로나로 외출을 자제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나의 권리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할 수 있다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커뮤니티에서도 끝없는 투표 인증이 올라오고 제주도나 부산에서 왔다는 학우들의 인증도 있었다. 이렇게 먼 곳에 있는 학우들도 오는데 가까운 우리들도 가야겠다며 수도권에 있던 학우들도 참여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어준 것이다.



나의 일정은 당일치기였다. 기차로 당일치기를 해본 적은 있지만 비행기로 당일치기는 나도 처음이었다. 빗방울이 추적추적 떨어지던 날, 홀로 공항을 향했다. 우산 하나를 들고서 아침 비행기를 탔다. 오랜만에 언덕을 올라가서 투표를 했다. 하고 나니 별 게 아니었다. 버스정류장에 가고, 그곳에서 40분 걸리는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고, 비행기를 한 시간을 타고, 그곳에서 역까지 삼십 분, 역에서 학교까지 이십 분. 이 과정들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별 게 아니었다. 1차 투표도 왔으면 좋았을 거라는 후회가 들었다.



점심시간을 피하기 위해 일찍 왔더니 식당이 문을 열지 않았다. 집까지 갔다 오기에는 멀어서 식당 앞에서 30분을 죽치고 기다렸다. 열자마자 뛰어들어가서 밥을 먹었다. 좋아하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남은 시간이 한적하게 느껴졌다.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산을 들고 길을 걸어갔다. 비가 많이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서울에 다시 오게 된다면 먹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카페'였다. 학교 앞에는 가성비가 좋은 카페들이 너무 많았고 그곳에서 궁금한 메뉴들을 모두 먹어보기 전에도 학교의 문이 닫혀버렸지만.



버스 정류장 맞은편 근처에는 제일 맛 좋은 카페가 있다. 커피도 맛있고 제철과일을 사용해 계절별로 다른 음료를 만드는 곳이었다. 언젠가 먹어봐야지, 하고 마음에만 담아둔 곳이었는데 가게 밖 간판이 눈에 띄었다. '계절 특선 체리에이드'. 싫어하는 사탕 중에서도 제일 생각나는 건 체리맛이라서, 후르츠 통조림 안의 체리가 보물 같아서, 가게로 향했다.



음료를 들고 버스에 탈 수는 없으니 에이드를 사게 된다면 걸어가는 건 확정이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에 골목 꼭대기에 위치한 집까지 걸어가려니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에이드가 더 간절했다. 통조림 안의 체리처럼 우중충한 하루에서 날 구해줄 것만 같았다.



가게는 좁았지만 아늑했다. 건네주는 에이드는 달큼한 향이 먼저 닿았다. 체리색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체리색이었다. 붉은색도, 분홍색도 아닌 체리색. 길가에 사람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며 한 모금 마셨다. 새콤달콤하고 맛있었다. 기분을 좋게 하는 새콤달콤이었다. 시콤하지만 달달하지도 않은 타협점. 길이 가파를 때마다 에이드를 한 모금, 또 한 모금 마시며 버텼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에어컨과 선풍기를 틀고 앉아서 남은 에이드를 마셨다. 달콤했다. 체리가 여름에 나는 과일이던가. 실제 과일 체리는 먹어본 적도 별로 없고 가공된 음식들만 먹어본 주제에 여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리는 여름이구나. 여름에는 이런 맛이구나.




남은 비행기 시간까지 나는 떡볶이도 먹고 과제도 하며 빈둥거렸다. 집에 도착하니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입 끝에는 아직 체리의 향이 남아있었다. 내 손에 남은 건 투표확인증 하나였다. 이 여정을 체리와 함께해서 다행이다. 뿌듯한 마음 하나와 체리에이드만 남았다.



그리고 우리는, 투표율 45.5% 달성에 성공했다. 겨우 이틀 간의 투표 기간 동안 5천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투표한 것이다. 시험기간이었고, 지방에 있는 학생도 많았다. 회사에 있던 학생들은 점심시간에 택시를 타고 와서 투표를 했다. 지방에 있던 학생들은 기차, 비행기를 타고 와서 투표를 했다. 우리의 권리를 위해 우리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시작에 불과했지만 우리의 시작은 완벽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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