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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비 Oct 05. 2020

치루 환자와 인공수정하는 날

2019년 4월 20일의 일기

드디어 오늘, 인공수정 d-day다.



아침 8시까지 가서 개미씨 정액 채취부터 해야하는데, 수술한 응꼬때문에 절뚝이면서도 유독 노트북을 보며 늑장을 부리기에 뭐하나 했더니만 usb에 본인의 야동을 담고 있었다..... 지난번 정액검사때 병원의 컬렉션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거기다 소중이의 피부보호를 위해 프리시드젤까지 챙기는 꼼꼼함에 할 말을 잃었.... 흠흠


개미씨는 치루 수술의 여파로 아직까지 제대로 앉는게 불편해 택시 안에서는 내 무릎을 베고 거의 누운 자세를 하고 갔다. 이 상태로 배출이 가능할까? (그의 고통보다 배출을 더 염려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니라구!) 걱정되는 가운데, 자기몸 아프면서도 짜증부리거나 싫어하는 기색도 없이 순순히 이 고생을 함께 해주는 신랑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잘 앉지도 못하는 상태에 집이 아닌 공간에서 배출하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제출까지(...) 해야한다는 것이 나라면 썩 내키는 일은 아닐 것 같은데, 그는 그런건 아무렇지도 않단다. 나만큼 간절하진 않아도 내가 많이 원하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 함께 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워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자기야, 그런데 그 야동들은 어디에서 난거야...??





30분 정도 걸려 병원에 도착하니 8시 5분. 3층에서 부부 모두 신분증 확인하고 혈관 등록후 팔찌를 채워줬다. 팔찌는 저녁까지 왠지 풀지 못하고 차고 있었다.


1. 정액 채취


개미씨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비밀의 방으로 보내고 나는 담당 선생님 진료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토요일 오전이라 대기자가 많았다. 나는 8시 30분 예약으로 개미씨따라 좀 일찍 온 셈이라, 오래 걸릴 것 생각하고 앉아서 편히 기다렸는데 30분도 되지 않아 개미씨가 올라왔다. 걱정과는 달리 다행히 잘 나왔던 것(??) 같다. 그러니까 무슨 영상을 챙겨간거냐구!!


새삼 이번 달에 인공수정을 하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숙제를 할 수 없는 몸상태라 자임시도였다면 이번달은 건너뛰었을 것이다. 시술을 하기로 한 덕분에 이렇게 시도라도 해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2. 초음파로 배란 상태 확인


초음파상에선 난포가 한개 빼고 모두 배란이 된 상태이고 내막 상태도 배란된지 몇시간 정도 지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쪽에서 다섯개의 난포가 한번에 자라 터진 게 처음일텐데 배 아프지 않으셨냐고 물어보신다. 어제 밤 12시쯤 배 속에 장기가 빵빵하게 터질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은 있었지만 진통제를 먹을 만큼은 아니었었다. 몸집이 작으면 더 불편할 수 있다는데 나는 공간이 넉넉해서 괜찮았나보다. 하하...


그것보다 이미 배란이 많이 된 상태라는게 걱정되었는데 선생님 말씀으론 인공수정은 배란이 먼저 된 후에 시술하는게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자임은 정자가 먼저 도달해 있는게 좋다고 들은 것 같은데, 시술은 좀 다른가 보다. 나이든 난자는 생존시간이 6시간에 불과하다는 기사를 본 것이 순간 스쳐지나갔다. 선생님의 준비가 아주 잘되었네요! 라는 말에 안심이 되면서도, 지난 두달도 준비는 잘되었었으니.. 너무 기대하면 안되는데..



3. 인공수정 시술


시술실이 있는 2층에서 대기하다 9시 40분이 지나고 드디어 이름이 불렸다. 시술실은 입원실처럼 되어 베드마다 커튼과 사물함이 있는 형태였다. 하의만 탈의하고 상의에 병원 가운을 입은채로 침대에 누웠다. 침대 끝으로 내려와 무릎을 세운 좀 민망한 자세로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



시술이 시작됐다.

힘빼세요, 라는 말과 함께 무언가 쑤욱 들어오는 느낌이 났다. 나팔관 조영술 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생리통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1-2분 정도 걸렸을까. 잘 들어갔습니다— 고생하셨어요, 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 간단한 시술이라고 익히 들었지만 진짜 허무할만큼 금방 끝났다.



시술을 마치고 선생님이 개미씨 정자 처리 결과지를 보여주셨다. 양도 지난번보다 많고(69m) 운동성도 50% 개선되어 97%로 올라 상중하에서 상에 랭크되었다(직진운동성에 대한 결과는 없었다). 다행이다. 지난번 유산한게 걱정이 되어 다른 주사같은 처방은 필요없을지 여쭤보니 선생님은 웃으시며 질정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하신다. 10분정도 누워있다 약국에서 질정 타고 바로 귀가. 주입된 정자가 난포까지 잘 가려면 좀더 누워서 기다려 줘야 하는게 아닐까 싶은데.. 움직여도 괜찮으니까 가라고 하신거겠지?


아무튼 이렇게 인공수정 1차 마무리. 이제는 아침 저녁 일정한 시간에 질정 넣으면서 결과를 기다리면 된다. 1차에 성공은 로또 수준의 확률이라고 한다.

실패해도 할 수 없지 뭐.
2차까지는 우선 직진해보는 걸로.



Melbourne,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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