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혐오는 우리의 운명이 아니며, 우리는 공감의 본능을 통해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건축가’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여기, 우리를 괴롭히는 두 번째 질문이 고개를 든다. 우리에게 공감의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자주, 그리고 이토록 손쉽게 혐오를 선택하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 자신의 가장 깊고 어두운 내면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그 흐릿한 거울 표면을 닦아냈을 때,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것은 타인의 추한 얼굴이 아니라, 차마 마주 볼 용기가 없었던 ‘자기혐오’라는 우리의 맨얼굴이다. 현대 사회에서 혐오가 전염병처럼 창궐하는 데에는, 바로 이 ‘자기혐오’를 동력으로 삼는 세 가지의 교묘하고도 강력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메커니즘은 ‘자기혐오의 투사’, 즉 내 안의 괴물을 남에게 떠넘기는 정신의 연금술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고통은, 바로 자기 자신의 결점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이다. 나의 무능함, 비겁함, 열등감, 비뚤어진 욕망. 이 어둡고 축축한 ‘내 안의 괴물’을 직시하는 것은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공포다. 이때 우리의 정신은 가장 손쉬운 방어기제, 즉 ‘투사’를 동원한다. 내 안의 어두운 방에 불을 켤 용기가 없는 사람은, 창문 너머 이웃집의 그림자가 괴물이라며 소리 지르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혐오는 이처럼,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자기혐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심리적 마취제다.
두 번째는 ‘자기기만’, 혐오라는 값싼 우월감을 탐닉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존감은 성실한 노력과 의미 있는 성취를 통해 오랜 시간을 들여 쌓아 올려야 하는 고된 건축물이다. 반면, 혐오는 단 한순간에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저렴하고 유혹적인 마약과 같다. 누군가를 ‘미개하다’, ‘비도덕적이다’라고 낙인찍는 순간, 나는 아무런 노력 없이 반사적으로 ‘문명인’,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 이 거짓된 우월감은 너무나도 달콤해서, 이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혐오의 대상을 찾아 헤매야만 하는, 비극적인 중독의 굴레에 빠진다.
세 번째 메커니즘은 ‘통제감의 환상’, 복잡한 세상에 대한 단 하나의 정답을 갈구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불안하다. 이 거대한 무력감 속에서, 혐오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단 하나의 명쾌하고도 매력적인 정답을 제시한다. “이 모든 건 OOO 때문이다!” 내 삶이 통제 불가능하다는 공포 속에서, ‘저들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세상을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는,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아온 것 같은 짜릿한 환상을 제공한다.
이 세 가지 메커니즘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심리의 그림자다. 하지만 왜 유독 어떤 개인, 어떤 사회에서는 이 그림자가 모든 빛을 삼킬 만큼 거대해지는 것일까? 누가, 그리고 어떤 세상이 혐오의 거울을 드는가?
‘혐오’라는 바이러스는 개인의 취약성과 사회의 병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폭발적으로 증식한다. 뿌리 깊은 열등감과 불안정한 자기애는 타인을 깎아내려 얻는 우월감에 중독되게 만든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만 구분하려는 흑백논리는 복잡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손쉬운 적을 찾아 헤매게 한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정서적 미성숙은, 이 모든 과정에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허락한다. 이처럼 약한 토대 위에 지어진 자아는, 혐오의 폭풍우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이 개인의 취약성은, 혐오를 배양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비로소 맹독의 꽃을 피운다.
첫째, 소셜미디어는 우리의 삶을 ‘전시되는 자아’의 끝없는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우리는 타인의 ‘좋아요’를 갈망하며 이상적인 모습을 연기하느라 지쳐간다. 그러나 화려한 가면 뒤에 숨은, 초라하고 불완전한 현실의 나는 점점 더 깊은 ‘자기혐오’의 늪에 빠진다. 이 고통스러운 간극을 견디지 못할 때, 우리는 타인의 삶을 훔쳐보며 그의 작은 흠결을 찾아내 비난하고 조롱하며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다.
둘째, 전통적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은 각자도생의 정글 속에 내던져진 ‘원자화된 개인’이 되었다. 역사상 가장 연결된 시대에, 우리는 가장 극심한 고독을 느낀다. 이 뿌리 뽑힌 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온라인상의 극단적인 이념 집단이 제공하는 ‘우리’라는 소속감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들은 외부의 ‘적’을 함께 혐오하며,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위험하고도 따뜻한 착각에 기꺼이 몸을 맡긴다.
셋째, ‘너는 할 수 있다’고 외치는 성과 사회는, 모든 실패의 책임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우리를 ‘자기 착취’의 굴레로 밀어 넣는다. 이 무한경쟁의 시스템 안에서 실패는 곧 ‘나’라는 존재의 실패가 된다.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는 대신, 이 억울한 분노는 가장 손쉬운 대상, 즉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향한 비난과 혐오로 터져 나온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확성기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알고리즘’이다. 기술은 우리의 불안과 고독, 분노를 먹고 자란다. 우리를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편견의 감옥에 가두고, 혐오를 증폭시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한다. 현대 기술은 역사상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소리 없이, 우리 모두를 서로를 미워하는 외로운 섬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혐오라는 괴물은 ‘전시되고, 원자화되고, 착취당하는’ 현대인의 나약한 자아와, 그것을 부추겨 이익을 얻는 병든 사회의 비극적인 합작품이다. 그것은 내면의 결핍이 사회의 균열과 만날 때 발생하는 거대한 정신적 팬데믹이다.
그러므로 타인을 향해 맹렬히 들이밀던 그 혐오의 거울은, 사실 우리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그 거울 속에 비친 것은, 우리가 그토록 경멸하던 타인의 추한 얼굴이 아니라, 상처 입고, 두려워하며, 사랑받고 싶어 울고 있는 우리 자신의 맨얼굴이었다. 이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차라리 거울을 깨뜨리고, 여전히 남 탓을 하는 편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병의 근원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어떤 치유도 시작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거울의 기원을 찾아, 더 깊은 역사의 심연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개인의 손에 들린 이 작은 거울이, 어떻게 거대한 광장의 함성이 되고, 시대를 불태우는 거대한 불길로 증폭되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