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낯선 골목에서 위협적인 상대를 마주쳤을 때, 심장이 철렁하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그 원초적인 감각을 기억하는가? 그 순간, 당신의 뇌에서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앞서 수만 년 된 경보 시스템이 울린다. ‘나와 다른 존재는 위험하다.’
혐오는 과연 21세기에 갑자기 나타난 학습된 질병인가, 아니면 우리의 뼛속 깊이 각인된, 부정할 수 없는 유산인가?
인류가 기록한 역사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장까지, 피의 강물은 단 한순간도 마른 적이 없었다. 이는 혐오라는 본능이 우리 유전자 속에 얼마나 깊이 각인된 문신인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증거다. 수만 년 전, 우리의 조상들에게 모닥불의 경계선 밖은 곧 미지의 공포이자, 생존을 위협하는 ‘타자’의 세계였다. 낯선 것에 대한 공포, 즉 ‘제노포비아(Xenophobia)’는 비합리적인 편견이 아니라, 나와 내 집단의 생존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어기제였던 셈이다.
이 원시적 생존 본능의 사령부는 우리 뇌의 가장 깊숙한 곳, 편도체(Amygdala)에 웅크리고 있다. 이 오래된 경보기의 목소리는 너무나 빠르고 강력해서, 우리는 종종 그것을 숙고된 이성의 목소리로 착각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혐오의 정치가 싹튼다. 사회심리학자 앙리 타즈펠이 주장했듯, 인간은 자신이 속한 ‘우리’라는 집단에 자부심을 느끼고, ‘저들’보다 우월함을 확인하며 안정감을 얻으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가진다.
대중의 편도체를 자극하는 법을 아는 교활한 선동가들은 바로 이 ‘사회 정체성’의 스위치를 누른다. 2016년부터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멕시코 이민자를 ‘범죄자’로 규정하며 백인 노동자 계층의 불안을 자극했던 방식, 브렉시트 찬성파가 유럽연합 이민자들을 ‘일자리를 빼앗는 기생충’으로 묘사했던 방식이 그러했다.
이는 비단 외국의 사례만이 아니다. 온라인 공간에서 특정 지역이나 세대를 향해 쏟아지는 멸시와 조롱 역시, 복잡한 사회 문제의 책임을 특정 ‘적’에게 떠넘기고 ‘우리’만의 결속을 다지려는 위험한 본능의 발현이다. 인류의 역사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학살로 가득한 것은, 이 강력한 본능에 대한 비극적 증언인 동시에, 그 본능을 교활하게 이용해 온 권력자들의 끝없는 욕망에 대한 기소장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야기가 이토록 절망적이기만 하다면, 우리는 어째서 법과 윤리를 만들고, 국경을 넘어 타국의 재난에 눈물 흘리며, 수십억이 함께 사용하는 문명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우리의 설계도에는 어두운 본능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에 ‘감염’된다. 이 작은 신경 세포, ‘거울 뉴런(Mirror Neuron)’의 발견은 인류에게 엄청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법과 제도가 없더라도, 우리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차마 잔인해지지 못하는 존재로 설계된 것은 아닐까?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가 ‘접촉 가설’을 통해 증명했듯, 인간은 서로 다른 타자와 직접 만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할 때, 낯섦에서 오는 공포를 넘어 신뢰를 싹 틔우는 존재다.
인종차별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얼굴을 마주해야 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화해위원회’는 이 위대한 가능성에 대한 역사적 증거다. 인권, 박애, 연대와 같은 인류의 가장 빛나는 발명품들은, 바로 이 ‘감염되고 접촉하는 능력’ 위에 세워진 눈부신 건축물이다.
인류의 가장 강력한 생존 무기는 이기심이 아니라,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협력하는 ‘초사회성(Ultrasociality)’이었다. 늑대나 침팬지도 무리를 짓지만, 그들의 협력은 대부분 혈연이나 소수의 아는 개체에 한정된다.
하지만 인간은 달랐다. 유전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수천, 수만의 낯선 타인과 협력하여 도시를 세우고, 국가를 만들고,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포유류인 것이다.
무엇이 이 기적을 가능하게 했을까? 바로 ‘언어’와 ‘이야기’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 법, 국가, 신, 돈, 인권 — 에 대한 공통된 믿음, 즉 ‘상상 속의 질서’를 공유함으로써, 혈연을 넘어선 거대한 협력의 틀을 창조했다. 이것이야말로 늑대의 송곳니나 곰의 발톱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인류 최고의 생존 무기였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신과 혐오로 무장한 고독한 생존 기계인가, 아니면 신뢰와 공감으로 연결된 위대한 공동체인가?
나는 이 지점에서 인간의 위대함과 희망을 본다. 우리는 혐오의 본능과 공감의 본능이라는, 서로 다른 설계도를 모두 손에 쥔 채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하지만 21세기의 건축가인 우리는 더 어려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우리를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필터 버블’ 안에 가두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메아리치게 하는 ‘에코 챔버’를 공고히 한다.
이 영리한 기술은 우리의 편도체에는 끊임없이 달콤한 먹이를, 거울 뉴런에는 낯선 자극을 차단하며 우리의 ‘선택’을 교묘하게 조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설계도의 노예가 아니라, 이 모든 기술적 장벽을 넘어 기어이 타인과 연결되기를 선택해야 하는, 이전보다 더 비극적이면서도 위대한 건축가다.
그렇다. 혐오는 우리의 ‘본성’의 일부일 수 있으나, 결코 우리의 ‘운명’은 아니다.
이것이, 이 길고 어두운 혐오의 역사를 탐험하면서도 우리가 끝내 희망을 이야기하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