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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철학자들의 경고: 니체와 한나 아렌트

1부. 혐오의 기원

by 조하나


증오의 반대말은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생각’이다. 한 알의 모래는 사막의 무게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광기라는 거대한 폭풍 속에서 생각 없이 던진 한 개인의 돌멩이는 과연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지는가?


인간의 마음속에는 ‘증오’와 ‘공감’이라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다. 철학은 바로 그 증오라는 이름의 늑대가, ‘무사유’와 ‘르상티망’이라는 먹이를 가장 좋아하며, 집단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장 포악하게 자라난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응시해 왔다.


인류가 만든 가장 끔찍한 지옥을 가장 깊이 들여다본 그들은, 우리에게 이 늑대를 길들이거나, 혹은 그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을 방법을 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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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 심리의 가장 어둡고 축축한 곳을 파헤친 철학자였다. 그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는 개념을 통해, 혐오가 어떻게 ‘도덕’과 ‘정의’라는 가장 성스러운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지를 폭로했다.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은 본질적으로 ‘수직적’이다. 그것은 약자(노예)가 강자(귀족)를 향해 품는, 실현될 수 없는 복수심이자 깊은 원한, 그리고 질투심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강자를 이길 수 없는 약자는, ‘가치의 전도’라는 교활한 정신적 복수를 감행한다. 강자의 덕목인 힘과 고귀함을 ‘악’으로, 자신의 나약함과 비굴함을 ‘선’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2025년, 우리가 목격하는 혐오의 풍경은 니체의 진단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더 기이하고 절망적인 양상을 띤다. 현대 사회의 ‘강자’는 과거의 귀족처럼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국경을 초월한 거대 자본,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알고리즘, 손에 잡히지 않는 글로벌 시스템이다. 이 거대하고 추상적인 강자 앞에서, 개인은 정신적 승리조차 꿈꾸지 못하는 완전한 무력감에 빠진다. 바로 ‘체념’의 단계다.


이때, 위로 향하지 못하게 된 르상티망의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가장 손쉬운 곳을 향해 방향을 튼다. 바로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를 향한 ‘수평적·하향적 혐오’다.


이것이 바로 ‘변이된 르상티망’의 끔찍한 얼굴이다. 최저임금 일자리를 두고 다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신과 똑같이 불안한 처지인 이주노동자를 혐오하고,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청년이 비슷한 처지의 다른 성별을 경쟁자로 여기고 증오한다. ‘나는 저 거대한 강자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너보다는 낫다’는, 가장 비참하고 초라한 형태의 우월감을 통해, 체념 속에서 자아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막는 마지막 방어기제인 셈이다. 결국 현대의 혐오는 강자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시스템에 완전히 굴복한 자들이 벌이는 ‘노예들끼리의 싸움’에 가깝다는, 더 서글픈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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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감정 과잉’의 노예를 그렸다면, 한나 아렌트는 ‘사유 없음’의 노예를 그려 보였다. 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악이 반드시 악마와 같은 광신도에 의해서만 저질러지는 것이 아님을 발견했다. 오히려 그것은 너무나도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질 수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 즉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목격했다. 그 악의 근원은 증오심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무사유(Thoughtlessness)’였다.


아렌트의 경고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서늘한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스마트폰을 든 당신의 손가락에 집중해 보자. 분노를 유발하는 기사의 제목만 보고, 본문은 확인하지 않은 채 ‘공유’ 버튼을 누른 적은 없는가? 전체 맥락이 거세된 채 악의적으로 편집된 짧은 영상을 보고, 한 사람의 인격을 단정하고 비난의 댓글을 남긴 적은 없는가? 수천 개의 ‘좋아요’가 달린 조롱 섞인 댓글에,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안도하며 슬쩍 나의 ‘좋아요’를 하나 더 얹은 적은 없는가?


이것들은 악의를 가지고 저지르는 거창한 악행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단지 내 의견을 표현했을 뿐’이라는, ‘남들도 다 하니까’라는 변명 뒤에 숨은, 너무나도 사소하고 평범한 ‘생각하지 않음’의 순간들이다. 우리는 그 순간, 내 행동이 한 개인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 우리 사회에 어떤 균열을 만드는지 사유하기를 멈춘다. 그저 집단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자극적인 정보에 반응할 뿐이다.


바로 이 사소한 무사유의 벽돌 하나하나가 모여, 한 개인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 한 집단을 말살하는 거대한 수용소의 벽을 쌓아 올린다. 아렌트의 마지막 경고는 그래서 더욱 섬뜩하다. 인류 최악의 비극을 불러온 것은 증오를 불태우는 광신도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생각하기를 멈춘, 바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 가장 큰 죄는 증오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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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고 경고했다. 한나 아렌트는 그 심연의 얼굴이 너무나도 평범해서 더 끔찍하다고 증언했다. 이제 우리는 안다. 인류의 가장 깊고 어두운 그 심연의 정체가, 바로 우리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두 괴물—자신의 상처를 정의라 착각하는 뜨거운 괴물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차가운 괴물—임을. 결국 철학이 도달한 마지막 결론은 이토록 서늘하고 명징하다.


가장 거대한 악은 광신도의 손이 아닌, 바로 이 괴물들의 속삭임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는 가장 평범한 우리의 손에서 완성된다는 것. 그리하여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증오를 선택하지 않을 책임,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을 책임. 이제 우리는 이 무거운 책임을 손에 들고, 이 괴물이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가면을 쓰고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는지 들여다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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