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장. IMF 키드의 자화상과 투사된 분노

2부. 혐오의 현재

by 조하나


1997년 겨울, 사람들은 장롱 속 깊이 잠자던 금붙이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국가의 부도를 막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았던 그 눈물겨운 애국심. 우리는 그 단결된 힘으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마지막 장례식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각자 살아남으라’는 차가운 명령뿐이었으므로.


위기 극복이라는 성공 신화 뒤에서, 우리 사회는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 아래 재편되기 시작했다.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고, 견고하던 중산층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라는 낯선 단어들이 일상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구조적 실패의 책임은, 기이하게도 개인에게로 향했다. ‘실패는 온전히 개인의 탓’이라는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윤리가, 우리 모두의 내면에 깊이 새겨졌다.






이러한 시대정신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2001년 말, 온 국민의 유행어가 되었던 한 신용카드 광고였다. 붉은 옷을 입은 배우 김정은이 환하게 웃으며 외치던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축복은, 사실상 우리 사회를 향한 거대한 저주가 되었다. 그것은 부에 대한 욕망을 공동체의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락하고, 심지어는 미덕으로까지 격상시킨 시대의 선언이었다. 개인의 부가 곧 행복이자 선(善)이라는 이 새로운 복음은, 노동의 신성함을 조롱하며 전 국민을 부동산과 주식이라는 거대한 투기장으로 내몰았다.



Whisk_d7c6b998b1.jpg



그리고 그 축복과도 같은 저주는 현실이 되었다. 2000년대 초반, 서울의 아파트값은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운 폭등을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자산이 두 배가 되는 사람들과,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내 집 한 칸 마련할 수 없는 사람들. 대한민국은 노동 소득이 아닌 자산 소유 여부에 따라 새로운 계급이 나뉘는 시대로 진입했다.

바로 이 토양에서, 특정 나이대가 아닌 하나의 정신적 증후군으로서의 ‘IMF 키드’가 태어났다. 그들은 실패에 대한 극심한 공포 속에서, 타인을 경쟁자로, 사회를 전쟁터로 인식하며 성장했다. 경쟁에서 밀려났다고 느끼는 순간, 그 화살은 시스템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향했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라는 자책은, 서서히 영혼을 갉아먹는 만성적인 자기혐오가 되었다.



Whisk_92c92a2e8a.jpg



살아남은 IMF 세대는 저항 대신 순응을 택했고, 그 죄책감을 잊기 위해 경쟁주의를 새로운 신앙으로 숭배했다. 그들은 생존의 공포를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아이들을 끝없는 사교육의 전쟁터로 내몰았다. 하지만 그 욕망의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다음 세대가 마주한 것은 약속의 땅이 아닌 끝없는 절벽, 즉 ‘88만 원 세대’와 ‘N포 세대’라는 절망적인 이름이었다. 시스템은 그들의 부모가 믿었던 것처럼 공정하지 않았고, 노력은 더 이상 성공을 보장하지 않았다. 부동산과 코인으로 벼락부자가 된 이들의 신화는, 성실하게 일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깊은 ‘한(恨)’과 상대적 박탈감을 새겨 넣었다.



Whisk_aa8ef23c9d.jpg




이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와 대물림된 절망의 고통을, 개인은 어떻게든 외부로 배출해야만 했다. 앞서 분석한 ‘투사’의 메커니즘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복잡하고 비극적인 형태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부동산과 코인으로 성공한 이들을 ‘투기꾼’이라 멸시하며 자신의 성실한 가난을 정당화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분노의 화살을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에게로 돌렸다. 한정된 일자리를 두고 다투는 이주노동자를 향해서는 생존을 위협하는 ‘침입자’라며 날을 세웠고, 한정된 사회적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다른 성별을 향해서는 ‘나의 몫’을 빼앗아가는 ‘잠재적 적’이라며 증오를 퍼부었다. 이 ‘수평적 혐오’는 거대한 구조에 저항할 힘이 없는 개인이,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짓밟으며 얻는 가장 비참하고 손쉬운 우월감의 표출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 모든 아픔과 상처를 ‘먹고살기 힘들다’는 단 하나의 절박한 명제 아래 덮어버렸다. 우리는 경제 성장의 숫자 뒤에 숨어, 무너진 내면을 돌아보지 않았다. 슬퍼할 시간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은 분노하는 법을 배웠고, 상처를 보듬어주지 못한 사회는 서로를 할퀴는 법을 익혔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혐오사회는 제대로 애도받지 못한 시대의 유령이 우리 곁을 떠돌고 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다.




Whisk_136eded44f.jpg







01_메일주소태그.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