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자기혐오의 투사’는 개인의 비극을 낳는다. 하지만 사회 전체가 집단적인 불안과 자기 의심에 휩싸일 때, 그리고 그 사회가 자신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투사할 단 하나의 스크린을 찾아낼 때, 역사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비극의 무대가 된다. 공동체는 자신의 죄와 불안을 씻어내기 위해 바칠 ‘제물’을 필요로 하고, 그 제물이 신성한 희생양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몸에 ‘낙인’을 찍는다. 인류의 역사는, 이 집단적 자기기만의 광기가 반복적으로 상연되어 온 거대한 극장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중세 후기부터 근대 초까지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사냥’이다. 페스트의 창궐, 계속되는 전쟁과 기근, 종교 개혁이 불러온 가치관의 대혼란. 당시 유럽 사회는 언제 신의 벌이 내릴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왜 이토록 고통받는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인가?’라는 집단적 자기 의심은, ‘아니다, 우리 안에 악마의 하수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가장 손쉬운 대답으로 대체되었다. 공동체의 죄책감과 불안이라는 ‘내면의 괴물’은, ‘마녀’라는 이름의 외부의 적에게 고스란히 투사되었다. 그들에게 ‘악마와 계약했다’는 붉은 낙인이 찍히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 공동체의 정화를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오염 물질로 전락했다. 사람들은 마녀를 화형대 위에서 불태우며, 자신들의 죄와 불안 또한 그 불길 속에서 함께 정화된다는 끔찍한 자기기만에 빠져들었다.
이 집단적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이 가장 체계적이고 잔인하게 작동한 사례는, 두말할 나위 없이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경제 파탄으로 국가적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던 독일 사회의 깊은 패배감과 자기혐오를, 히틀러와 나치당은 유대인이라는 단일한 대상에게 투사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유대인에게 ‘민족의 기생충’, ‘독일의 순수한 피를 오염시키는 질병’이라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격하시켰다. 독일인들은 유대인을 혐오하고 박해함으로써, 자신들의 패배감을 보상받고 ‘위대한 아리아인’이라는 거짓된 우월감을 맛볼 수 있었다.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은, 한 민족이 자신의 나약함과 자기혐오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을 때, 그 대가로 타인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거울이었다.
이 집단적 자기기만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 2025년의 지구 곳곳에서, 역사의 망령은 가장 현대적인 옷을 입고 우리를 조롱하고 있다.
관용과 이성, 혁명의 상징이었던 유럽 대륙을 보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극우 정당들은 ‘위대한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며 세력을 넓히고 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낳은 경제적 불안과 이슬람 이민자들로 인한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라는 대중의 공포를 정확히 파고든다. 난민들은 더 이상 보호해야 할 약자가 아니라,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문화를 위협하는 침입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는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과 정확히 같은 맥락이다. 강화된 이민자 단속은 국경 지대를 거대한 수용소로 만들고, 언론은 연일 ‘불법 이민자’들의 범죄를 헤드라인으로 뽑아내며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킨다. 그 결과, 광장들은 둘로 쪼개졌다. 한쪽에서는 ‘추방’을, 다른 쪽에서는 ‘환대’를 외치며 서로를 향해 삿대질한다.
그리고 이 극우 포퓰리즘의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우리는 헝가리와 같은 나라에서 목격한다. 한때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국가는, 강력한 지도자가 ‘국민’과 ‘내부의 적’을 규정하고, 그들을 공격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은 뒤, 점진적으로 사법부와 언론을 장악하며 사실상의 ‘독재’ 국가로 변모해 갔다. 혐오를 동력으로 삼은 정치가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자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대한 가장 섬뜩하고 현실적인 사례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겪고 있는 비극의 거울상이다.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에 의해 기습적으로 선포된 2024년 12월 3일의 불법 비상계엄은 이 땅의 누가 ‘국민’이고 누가 ‘내부의 적’인지를 국가 권력이 직접 낙인찍으려 한 폭력적인 시도였다. 그 시도가 실패한 후, 우리 사회에 찾아온 것은 화합이 아닌 더 깊은 균열이었다. 그 균열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2025년 1월 19일,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벌어진 폭동은 온라인을 떠돌던 증오가 어떻게 아스팔트 위에 피를 뿌리는 현실의 폭력이 되는지를 끔찍하게 증명했다.
‘대한민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Korea Great Again)’를 외치는 이들이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흔드는 아이러니한 풍경은, 자신들의 불안한 정체성을 외국의 강력한 상징에 투사하여 국내의 정치적 반대파를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려는, 역사상 수없이 반복된 ‘제물 찾기’ 의식의 21세기 버전이다.
결국, 역사의 거대한 비극들은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우리 안의 어둠을 직시하는 대신, 타인의 피를 제물로 바치는 손쉬운 길을 선택해 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