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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도시 재방문기, 낯선 익숙함 속에서

4부. 땅 위에 그리는 새로운 원, 덜어냄의 미학

by 조하나


기차의 문이 열리고 서울역 플랫폼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심연의 세계가 나에게서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되돌려준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바로 예민하게 살아있는 오감(五感)이었다. 그리고 도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모든 감각의 통로 속으로 자신을 맹렬하게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그저 ‘배경’으로 존재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날카로운 ‘전경’이 되어 쇄도했다. 심연의 단조롭고 깊은 푸른색 속에서 비로소 ‘쉼’을 배웠던 눈은, 쉴 새 없이 터지는 광고판의 원색과 현란한 쇼윈도,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들을 소화해야 하는 고역에 내몰렸다. 한 가지 소리, 즉 나의 호흡 소리에만 집중하는 법을 배웠던 귀는, 열차의 소음과 안내 방송, 상점에서 새어 나오는 유행가, 사람들의 목적 없는 말들이 뒤섞인 거대한 소리의 반죽에 담가졌다.


지하철 환풍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눅눅한 먼지 냄새, 가판대의 델리만쥬와 떡볶이 냄새, 그리고 누군가의 진한 향수 냄새가 뒤섞인 후각의 혼란은, 오직 물과 돌의 깨끗한 냄새만이 존재했던 세계에서 돌아온 나에게는 거의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감각은 원치 않는 타인과의 접촉이었다. 연결감 없는 강제된 친밀함.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타인의 몸이 내 등을 밀고, 어깨가 내 팔을 스치는 그 불가피한 마찰. 심연의 압력이 나의 경계를 명확히 해주며 존재를 감싸는 정직한 힘이었다면, 도시의 접촉은 경계를 허무는 무례한 침범이었다. 그곳에 있는 누구도 서로를 원하지 않지만, 시스템의 효율을 위해 우리는 기꺼이 서로의 영토를 내어주고 있었다.


도시는 그렇게 모든 감각을 빈틈없이 채우고 과포화시켜 개인이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할 아주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거대한 기계처럼 보였다. 이전의 나라면, 아마 이 감각의 홍수 속에서 다시 길을 잃고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모든 감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 안에,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아주 작은 ‘고요의 영토’가 생겨났다는 것을. 사방에서 소음이 나를 폭격하고 있지만, 그 소음들이 더는 내 존재의 핵까지 함부로 닿지 못하고, 마치 방음벽에 부딪히듯 튕겨 나가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심연이 나에게 선물한, 소음 속에서 고요를 찾는 내면의 힘이었다. 나는 도시의 한복판에 서 있었지만, 동시에 그곳에 온전히 속해 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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