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해가 뜨자 잠에서 깬다. 알람 소리가 아니라, 동쪽 창으로 스며드는 빛의 농도가 나를 깨운다. 새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뒤섞인 고요 속에서 천천히 커피를 내리며, 나는 문득 과거의 내가 매일 같이 확인하던 ‘점수판’을 떠올린다.
그 점수판에는 통장 잔고나 직함 같은 것들뿐 아니라, 이번 시즌 브랜드 쇼케이스에 몇 번이나 초대받았는지, 내 기사에 ‘좋아요’가 몇 개나 달렸는지, 업계의 누가 내 이름을 기억하는지와 같은 미세한 점수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도시를 떠난 후 한동안 나는 그 점수판을 보지 못해 불안했다. 점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 이름이 지워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그 점수판의 존재 자체를 잊고 살게 되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잃었다’는 상실감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오히려 평생을 나를 짓누르던, 보이지 않는 갑옷을 벗어던진 듯한 가벼움이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도,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도 없는 존재의 평온함.
나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부자가 되었다. 나의 새로운 재산 목록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타인에게 증명할 수도, 빼앗길 수도 없는 것들이다.
나의 첫 번째 자산은, 누구의 허락도 구할 필요 없이 온전히 내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더 이상 마감에 쫓기거나, 원치 않는 약속에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책을 읽고 싶으면 온종일 책을 읽고, 숲에 나가고 싶으면 해가 질 때까지 흙을 걷는다.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이토록 충만한 자유라는 것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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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쓴 문장이 당신에게 가 닿기를|출간작가, 피처에디터, 문화탐험가, 그리고 국제 스쿠버다이빙 트레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