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멕시코에서의 케이브 다이빙은 거대한 도전이었다. 오랜 시간 바닷속에서 다이빙하던 나에겐 깊은 정글 속 어둡고, 위험하고, 자칫하면 다시 나올 수 없는 깊은 수중 동굴로의 탐험은 불가능한 ‘꿈’과 같았다. 무거운 탱크와 장비를 정글로 나르고 냉철한 판단과 지구력, 집중력, 체력이 필요한 케이브 다이빙 세계는 남성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 케이브 다이버 나탈리를 발견했다. 그렇구나, ‘여성’도 할 수 있구나.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케이브 다이빙으로 멕시코에 갔다가 팬데믹으로 오도 가도 못하고 고립되어 있을 때 그 대륙 전체가 ‘아시안 헤이트’로 물들었다. 미국과 멕시코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의 지도자가 ‘차이나 바이러스’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었고, 수많은 아시안이 길 가다가 봉변을 당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는 깊은 정글 속에서 다이빙하는 시간 이외엔 생필품을 사러 슈퍼마켓에 가는 것 말고는 숙소에서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인종’이라는 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가 선택한 적도 없는,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걸로 차별을 받아야 한다니,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불특정 다수의 폭력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니, 억울하고, 비참하고, 슬프고, 무력감을 느꼈다. ‘인종’과 ‘젠더’는 ‘아시안 여성’이라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깊은 질문을 던졌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보부아르는 생물학적인 ‘성(Sex)’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Gender)’을 구분했다. 태어날 때 결정되는 생물학적 특징이 한 사람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대신, 사회와 문화가 ‘여성은 이래야 한다’고 규정하고 기대하는 역할, 행동 양식, 가치관 등을 교육하고 주입함으로써 한 개인이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즉, ‘여성성’은 선천적인 본질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학습되고 형성되는 후천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여성의 역할이 생물학적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보부아르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거나 부수적인 ‘제2의 성’으로 취급받는 현실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억압의 결과임을 증명한 것이다.
‘여성성’은 사회가 규정하고 주입하는 관념의 총체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가 ‘만들어 내는’ 여성상은 어떨까. 나는, 우리는, 어떻게 ‘여성’으로 만들어져 왔을까. 그리고 이 사회가 만들어 내는 여성상은 ‘나’와 ‘너’라는 한 개인, 한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나는 운이 좋은 여자이다. 지금까지 살아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남자아이들이 고무줄을 끊거나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치마를 들치고 도망가면 사람들은 ‘네가 좋아서 그러는 거야’ ‘네가 예뻐서 그러는 거야’라고 했다. 엄마도, 선생님도 그랬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여자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순종과 체념의 태도를 주입했고, 남자아이들에게는 여성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성은 어떤 이유로든 여성을 괴롭혀도 괜찮다는 정당성과 면죄부의 빌미를 남겼다.
초등학교 담임선생이 여자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몸 이곳저곳을 조몰락거렸던 게 기억난다. 언제나 그렇듯 “아이들이 예뻐서”였다. 중학교 땐 그 어떤 선택권도 없이 여자라서 가정 교과를 배워야 했고, 남자라서 기술을 배워야 했다. 가정 시간, “여성의 사명은 밥하고 집안일 잘하는 현모양처”라는 선생님에게 미래의 남편과 아이를 위해 맛있고 영양 가득한 음식을 요리하는 법은 배웠지만, 정작 성(姓)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피임을 할 수 있는지, 남자들이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강요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성폭력을 당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정규 수업 과정을 통틀어 어른들은 단 1분도 우리에게 할애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남자아이들은 불법 포르노를 통해 성을 배웠고, 여자아이들은 그런 남자아이들에게 배웠다.
여고에 다닐 땐 남자 학생주임이 걸핏하면 교실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들 브래지어 끈을 뒤에서 불시에 잡아당겼다. 그게 다 우리들 잘되라고 그러는 거였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나. 인적이 드문 새벽 등굣길, 혼자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시간을 물었다. 시계를 한번 내려다보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난생처음 ‘바바리맨’을 만났다.
그는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자위하고 있었다. 학교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길에도 다리가 풀려 몇 번을 주저앉았다. 눈앞이 깜깜하고 심장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교실에 들어선 나는 엉엉 울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화가 나면서 치욕스럽고, 또 무섭고 두려웠다.
내가 가장 처음 맞닥뜨린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내 잘못 같았고, 내가 더럽혀진 기분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간간이 당해왔던 그 이름 짓지 못한 행위가 바로 ‘성희롱’과 ‘성추행’이었구나. 그리고 그때마다 느꼈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바로 모욕감이었구나. 아직 나 자신을 사회의 ‘여성’으로 채 인식하기 전부터 한 ‘인간’으로서의 모욕감. 20년이 지난 일인데도 나는 아직도 그날 아침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이후 학교 가는 길은 지옥으로 변했다. 한동안 혼자서 길을 걷는 자유를 잃었다. 한동안 비슷한 옷차림이나 형태만 봐도 나자빠졌다. 그 당시 여고 주변엔 각 학교를 대표하며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바바리맨’들이 있었는데, 어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자아이들은 생리가 시작된 이후부터, 아니 태어나며 성별이 정해진 이후부터 성인이 되어서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성폭력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암암리에 애쓰며 산다. 본인 스스로 그걸 인지하든 못 하든 어쨌든. 자신이 피해자가 되고 안 되고의 선택권이 전혀 없다. 남자가 가해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선택할 때 자연스레 결정되는 것이다. 남자는 결정할 수 있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 내가 누구에게 원한을 사지 않고 평생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대도 상관없다. 이건 내가 의지로 막을 수 있거나 미리 준비할 수 있는 형태의 일이 아니다.
수없이 혼자 다닌 여행길에 낯선 곳에서 길을 물었던 사람들이 행여 딴맘을 먹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 없다. 아침, 저녁으로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 몸을 더듬기만 했지, ‘묻지 마 폭행’으로 칼을 꺼내 그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 없다.
매달 잡지사 마감 기간이면, 새벽 두세 시까지 원고 쓰다 피곤한 몸을 겨우 욱여넣은 택시 안에서도 기사와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여자가 이 시간까지 좋은 거 하며 놀았냐”고 묻는 택시 기사에 감이 안 좋다 싶으면 깊은 새벽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를 걸어 내내 통화하는 척을 하거나 친구에게 차량 넘버를 보내놓곤 했다. 혹시나 택시 기사가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아닐까, 해코지하지 않을까, 천근만근 감기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떠야 했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아서, 시선으로, 말로만 괴롭히는 택시 기사들을 만났지, 나를 상대로 더한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만나지 않았기에 다행히 나는 지금, 여기, 살아 있다. 그래서 나는 운이 좋은 여자다. 아무도 없는 새벽길에 만난 그 ‘바바리맨’은 작은 체구의 고등학생 여자아이에게 더 끔찍한 짓을 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온전히 그의 선택이었다. 결국 나의 생존은 나의 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잠재적 가해자의 시혜에 가까운 ‘선택’에 기댄 위태로운 ‘운’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사회가 여성을 ‘제2의 성’으로 만들어 온 방식이다. 나는 그렇게 ‘여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깊은 무력감에 여러 번 빠졌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간이나 살인, 폭력에 노출될 확률이 ‘남성’보다 훨씬 더 크다. 그저 남자가 막연히 좋은 사람이길 기대하는 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누구나 사는 건 다 힘들지’라고 한다면, BLM 운동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고 외치는 사람에게 ‘모든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여성들에게 ‘생리’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되는 금기어였던 적이 있었다. 생리대를 사러 갈 땐 동네 슈퍼나 편의점 점원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부터 했다. 남자라 말도 못 꺼내고 못 사고 돌아 나온 경우도 있었다. 용기를 내어 남자 점원에게 생리대를 내밀고 계산하면서도 그 눈빛과 미소를 참아내야 했다. 그러다 가끔 계산을 마친 생리대를 점원이 검은색 봉투에 넣어주면 ‘이 사람 센스 만점’이라며 감탄했다.
생리통이 심장마비의 고통에 준한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에야 나왔지만, 내가 어렸을 땐 여자가 생리를 한다는 건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한 달에 며칠은 산송장처럼 지내야 하는데, 학교 다닐 때도 사회에 나와서도 남성들은 무지하고 무심했다. “오늘 좀 까칠하네. 오늘 ‘그날’이야?”라는 질문은 요즘 하면 성희롱이지만, 예전엔 한 달에 한 번은, 여자라면 꼭 들어야 하는 ‘머스트 해브 토크’였다.
생리를 하는 것이 죄책감과 모욕감으로 느껴졌다. 동시에 여자라는 것 자체가 죄책감과 모욕감을 느껴야 하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아이를 낳으라고 말하는 사회가 생리를 해야 애를 낳을 수 있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면서 생리하는 걸 여자들이 일생일대의 치욕처럼 느끼도록 취급했다. 5년 넘게 4대 보험 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생리 휴가를 쓴 적은 단 하루도 없다. 회사를 박차고 나와 더 이상 눈치 볼 상사도, 동료도 없는 지금은 여자들의 생리를 걸고넘어지는 남자들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야, 너도 네 엄마가 생리해서 이 세상에 나왔어!”
세계 최초로 학생들에게 생리용품을 무상으로 제공한 스코틀랜드는 이제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로 범위를 넓혔다. 뉴질랜드 역시 여학생들에게 생리용품을 무료로 제공한다. 대부분 여성이 총리나 대표 자리에 있을 때 결정된 정책이다. 한국의 정부와 입법부, 사법부를 비롯해 각종 시민단체와 이익집단 등에서 여성을 찾기 어렵다. 남성 의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국회에선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 의원에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고 혀를 찬다.
한국은 정부나 공당에서 벌어진 갖가지 성폭력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고 들여다보고 고쳐야 할 권력조차 여전히 남성에 의해 이뤄진다. 오랜 시간 스토킹으로 고통받는 여성이 어렵게 신고하자 판사는 구속 영장을 기각한다. 가해 남성의 신변이 확실하고 도주 우려가 없기 때문이다. 이후 남성은 여성을 찾아가 살해한다. 여성은 세상에서 지워졌고,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된다.
내가 다니던 대학 주변엔 노란 간판에 빨간색 궁서체 두 글자 간판이 붙은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이 있었다. ‘앵두’ ‘무정’ 같은 이름에 가게 유리문은 까만 필름지로 덮여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곳.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선배들은 신입생 환영회를 한답시고, 군대 가기 전 기분 풀어준답시고 남자아이들을 거기에 데리고 갔다. 남자 선배와 동기, 그리고 후배들은 그곳을 ‘방석집’이라 불렀다. 남자들은 ‘방석집’을 통해, 그렇게 끈끈한 사회적 유대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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