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모인 강사들과 함께 일하는 국제 다이빙 센터에서 나는 종종 동료였던 서구권 친구들의 태도에 놀라곤 했다. 그들의 태도는 무책임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그들은 실수해도, 무언가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도, 늘 당당했다. 어깨를 으쓱하며 “음, 이건 좀 아쉽네.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뭐.”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실패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데이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의 단단한 회복탄력성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내 안에 내장되어 있던 습관적인 자기방어 기제를 발견했다. 나는 충분히 열심히 했고, 때로는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칭찬 앞에서는 늘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이 말은 한국 사회에서 겸손이라는 이름의 예의이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한국인이 진심으로 자신이 부족하다고 믿는다. 충분히 뛰어나고, 성실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왜 충분히 잘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부족하다고 말하는 걸까? 왜 한국인들은 유독 자존감이 낮을까? 이 질문의 뿌리에는, ‘겸손의 미덕’이라는 아름다운 포장지 아래 숨겨진, 우리 사회의 지독한 역설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인의 자기 비하적 태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시대로부터 500년 넘게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유교적 ‘겸손(謙遜)’과 마주하게 된다. 본래 유교적 세계관 속에서 겸손은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君子)’가 갖추어야 할 핵심적인 도덕적 역량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어 남을 존중하고, 항상 배운다는 마음으로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와 직결되었다. 따라서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무능함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배움을 멈추지 않는 수양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라는 고상한 철학적 자기 선언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고상한 도덕률은 엄격한 위계질서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사회적 장치로도 기능했다. 관계 중심의 사회에서 겸손의 표현은 윗사람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하지 않겠다는 안전 신호였다. 즉, 겸손에는 ‘미덕’과 ‘전략’이라는 이중성이 처음부터 내재해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유교적 도덕의 영향력은 약화했지만, 경쟁적이고 암묵적인 위계 구조는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있다. 그 결과, 겸손의 ‘행위’(자기 낮춤)는 지속되지만, 그 ‘기능’은 내면적 성숙의 표현에서 사회적 비판을 피하고 경쟁의 불안을 관리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변모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말하는 “아직 부족하다”라는 말은, 그 원형적 의미가 사라진 채 전략적 수행만 남은 공허하고 신경증적인 현대적 유산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유산은 ‘눈치’와 ‘체면’이라는 독특한 심리적 기제를 통해 우리 삶을 지배한다. 외국 학자들이 한국인의 심리를 이해하는 열쇠로 자주 이용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한국 문화에서 ‘체면(體面)’은 단순히 개인의 품위나 자존심을 넘어, 공동체에 의해 공인받는 사회적 명예이자 평판을 의미한다. 체면을 잃는 것은 개인적 수치심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죽음’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그 파장은 소속 집단 전체에 미칠 수 있다.
‘눈치’는 바로 이 체면 중심의 사회를 항해하는 필수적인 기술이다. 타인의 말하지 않은 의도나 감정, 상황의 분위기를 신속하게 파악하여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 고도의 사회적 지능. 이는 생존 역량으로 여겨진다. 눈치 없이 행동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혀 집단으로부터 배제될 수 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