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희미한 얼룩을 남기는 ‘정서적 방치’에 대하여.
어린 시절 나의 세계는 현관문을 기준으로 안과 밖이 나뉘었다. 텅 빈 집의 서늘한 공기와 홀로 끓여 먹던 라면의 짠내가 나의 안이었다면, 현관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밀려 들어오는 엄마의 지친 한숨과 아빠의 희미한 술 냄새는 나의 밖이었다. 맞벌이하는 가정의 무남독녀였던 나는,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나를 분리하는 법을 일찍이 터득해야 했다.
아빠는 지방 현장을 다니며 짧게는 일주일에 한 번, 길게는 한 달에 한 번 집에 왔고, 엄마와 아빠는 만나면 자신의 인생이 불행한 이유를 서로에게 추궁하며 저주를 퍼붓곤 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가정을 돌봐야 했던 엄마에겐 아빠를 꼭 닮은 내가 얄미운 존재였고, 그런 엄마의 고통을 공감하고 보듬지 못하는 아빠에겐 모든 것이 도피하고픈 현실일 뿐이었다.
그 속에서 무시와 외면 속에 자란 나는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려 끊임없이 친구들에게 집착했다. 주변에 늘 많은 사람들을 곁에 두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종종 내가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곤 했다.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늘 밝고 활기찬 모습을 보였지만, 한편으론 상대가 나에게 잘해주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는 순간, 그 즉시 이 행복이 언제 끝날까 불안해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에도 나는 부모에게 관심받지 못했다. 나는 무언가를 성공해도 축하하기보다는 이를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기며 잊히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이는 내 존재의 가치나 내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 자존감의 기초가 침묵과 외면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내면화된 방치 스키마(Internalized Neglect Schema)’라고 부른다. 이는 시간이 흐르며 뇌가 방치와 묵살을 당연하게 예상하고, 자신의 욕구는 타인에게 짐이 될 뿐이라고 스스로 규정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렇듯 오랫동안 충분히 무시당하고 외면당한 아이는 결국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사랑이나 우정을 비롯한 모든 신뢰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이해를 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 스스로를 설득한다.
나는 크게 울고 불평하며 과격하게 굴어 관심을 요구하는 대신 침묵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 아이였다. 겉으로 보기에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심오한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무시당하고 외면받는 느낌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존감의 기초에 깊은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뼈아픈 진실이 있다. 부모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아이를 방치하는 건 뚜렷한 학대나 잔인함처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단순한 부모의 정서적 부재로만 비치기도 한다. 대답 없는 질문, 눈 맞춤의 부족, 잊힌 생일, 또는 너무 바쁘고, 너무 지치고, 다른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아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부모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는 아이의 심리에 깊숙이 자리 잡아 그들이 자신을 보는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심지어 수십 년 후 관계를 맺는 방식까지 형성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아이들이 회복력이 있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가정한다. 맞는 말이다. 아이들은 적응한다. 하지만 적응이 치유와 동의어는 아니다. 무시당하고 외면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신을 움츠리고, 자신의 욕구를 숨기고, 자기가 다른 사람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함으로써 적응한다. 그리고 이러한 적응은 어린 시절을 살아남을 수 있게 하지만, 그들이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성인 시절을 조용히 괴롭힐 수 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