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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네온 선율 위로 읊조리는 인생이라는 모노드라마

김창완 '시간' (ft. 고상지)

by 조하나


2020년, 산울림의 전설이자 우리 시대의 어른 김창완무려 37년 만에 솔로 앨범 <문(門)>을 들고 찾아왔을 때, 대중과 평단은 화려한 복귀작이 아닌 소박한 어쿠스틱 기타 앨범이라는 점에 놀랐고, 그 안에 담긴 깊은 사유에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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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앨범의 정점에 위치한 곡이 바로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와 함께한 '시간'이다. 이 곡은 노래라기보다는 연기자로서 수많은 인생을 살아온 김창완이 자신의 목소리라는 악기 하나로 펼쳐 보이는 4분 35초짜리 모노드라마에 가깝다.


김창완은 이 곡에서 가창의 기교를 완전히 배제한다. 대신 그는 연극 무대 위에서 독백하듯, 혹은 술잔을 앞에 두고 오랜 벗에게 이야기하듯 가사를 툭툭 뱉어낸다. 정확한 음정이나 박자를 무시하고 호흡과 감정의 흐름을 따르는 이 '말하는 듯한 노래'는 그가 40년 넘게 쌓아온 연기 내공과 음악적 연륜이 만나는 지점에서 폭발적인 호소력을 얻는다.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가는 게 아니야. 시간은 그냥 거기 있는 거야"라고 무심하게 던지는 그의 목소리에는,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을 아쉬워하는 회한 대신, 시간이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노년의 평온함과 관조가 깃들어 있다.


이 건조하고 담담한 독백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국내 독보적인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의 몫이다. '악마의 악기'라 불릴 만큼 연주자의 영혼을 갉아먹으며 소리를 낸다는 반도네온은 김창완의 목소리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여백을 파고들며 놀라운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김창완의 보컬이 현실을 직시하는 이성의 목소리라면, 고상지의 반도네온은 그 이면에서 울렁거리는 슬픔과 낭만, 그리고 지나간 청춘의 환영을 청각화한 감성의 소리처럼 들린다. 때로는 아코디언처럼 경쾌하게, 때로는 첼로처럼 묵직하게 흐느끼는 반도네온의 선율은 김창완의 철학적인 가사에 짙은 페이소스를 덧입히며 곡을 한 편의 서사시로 완성한다.


김창완은 앨범 발매 당시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노래가 아니라, 시간과 함께 늙어가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글로벌 팬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단절과 고립의 시기에 발표된 이 곡은 멈춰버린 듯한 시간 속에서 불안해하던 대중들에게 "시간은 우리를 스쳐 지나가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 우리를 이루는 것"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깊은 위로를 건넸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의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음유시인이 건네는 가장 우아하고도 묵직한 위로이다.








아침에 일어나 틀니를 들고 잠시
어떤 게 아래쪽인지 머뭇거리는 나이가 되면
그때 가서야 알게 될 거야
슬픈 일이지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얼마나 달콤한지
그게 얼마나 달콤한지
얼마나 달콤한지
그걸 알게 될 거야


영원히 옳은 말이 없듯이 변하지 않는 사랑도 없다
그 사람이 떠난 것은 어떤 순간이 지나간 것
바람이 이 나무를 지나 저 언덕을 넘어간 것처럼
유치한 동화책은 일찍 던져버릴수록 좋아
그걸 덮고 나서야 세상의 문이 열리니까
아직 읽고 있다면 다 읽을 필요 없어
마지막 줄은 내가 읽어줄게

왕자와 공주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그게 다야
왜 이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시간은 동화 속처럼 뒤엉켜 있단다


시간은 화살처럼 앞으로 달려가거나
차창 밖 풍경처럼 한결같이 뒤로만 가는 게 아니야
앞으로도 가고 뒤로도 가고 멈춰 서있기도 한단다
더 늦기 전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
모든 눈물이 다 기쁨이고 이별이 다 만남이지
사랑을 위해서 사랑할 필요는 없어
그저 용감하게 발걸음을 떼기만 하면 돼


네가 머뭇거리면 시간도 멈추지
후회할 때 시간은 거꾸로 가는 거야
잊지 마라 시간이 거꾸로 간다 해도
그렇게 후회해도

사랑했던 순간이 영원한 보석이라는 것을


시간은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하지만
언젠간 풀려버릴 태엽이지


시간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지만
찬란한 한순간의 별빛이지


그냥 날 기억해줘
내 모습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꾸미고 싶지 않아
시간이 만든 대로
있던 모습 그대로


시간은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하지만
언젠간 풀려버릴 태엽이지
언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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