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은 나의 환상통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그의 저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역사의 천사를 묘사하며, "우리가 일련의 사건들을 보는 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다른 잔해를 끊임없이 쌓아 올리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본다"고 했다. 지금 나의 시선이 바로 그렇다. 2024년과 2025년의 세계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원회귀하고 있다는 현기증이 인다.
지금 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놀랍게도 이미 우리가 겪은 일들이다. 시차만 존재할 뿐, 비극의 각본은 소름 끼치도록 동일하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점령과 인종 청소는 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수용소가 되어버린 땅, 존재를 부정당하고 언어를 뺏기며 '2등 시민'조차 되지 못했던 우리의 일제강점기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서 절규했듯, 식민지인은 "자신의 땅에서 이방인이 되는 경험"을 뼛속 깊이 새긴다. 가자의 아이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잿빛 먼지를 뒤집어쓴 채 울부짖을 때, 나는 그곳에서 1940년 경성의 골목, 이름 없는 군화 발에 짓밟히던 조선의 아이들을 본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으나,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폭력 아래서 정확히 같은 좌표에 서 있다.
미국의 베네수엘라 주권 침해와 경제 제재는 어떠한가. 강대국의 이념 논리에 의해 한 국가의 경제가 파탄 나고, 국민들이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어야 하는 현실. 이것은 해방 직후,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어진 38선과 그로 인해 혼란과 가난 속에 방치되었던 미 군정 시대의 데자뷔다. '자유'라는 명분 아래 행해지는 강대국의 개입이 약소국의 평범한 식탁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란. "여성, 생명, 자유"를 외치며 히잡을 불태우는 이란의 거리에서, 나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목격한다.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이 자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눌 때, 그 공포를 뚫고 서로의 어깨를 걸었던 그 숭고한 연대를 기억한다. 이란 청년들의 피 흘리는 얼굴은, 금남로에서 쓰러져가면서도 끝내 민주주의를 놓지 않았던 광주의 청년들과 겹쳐진다. 그들은 다른 언어로 구호를 외치지만, 그 목소리의 파동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이 공명이 가장 서늘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현재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는 ICE(이민세관단속국)의 작전이다. 이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작전'은 단순히 불법 체류자를 단속하는 행정 절차가 아니다. 그것은 평온한 일상의 공간인 집과 일터에 무장한 공권력이 들이닥쳐, 한 인간을 강제로 격리하고 추방하는 '인간 사냥'이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법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공간에서 인간이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로 전락한다고 경고했다. 미국에서 이민자들이 겪는 이 공포는, 지난겨울 우리가 목격했던 12.3 내란의 밤과 끔찍하게 닮아 있다.
헌법이 정지되고, 계엄군이 국회의사당 창문을 깨고 난입하며, 시민들의 일상이 순식간에 군홧발 아래 놓였던 그 밤. 국가가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아니라, 언제든 나를 해칠 수 있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그 원초적인 공포 말이다.
미국의 이민자 가족이 백주 대낮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공포에 질리듯, 우리 역시 그날 밤 헬리콥터 소리에 잠 못 이루며 전율했다. 이것은 먼 역사가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 문밖에 도사리고 있는 '예외 상태'의 공포다.
왜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혹자는 이것을 과도한 감상주의라 폄하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이자 본능이다. 후성유전학은 트라우마가 유전자의 발현 방식에 영향을 미쳐 후대에게 전달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우리의 몸에는 식민지와 전쟁, 독재를 겪어낸 선조들의 공포와 생존 본능이 DNA 형태로 각인되어 있다.
뇌과학에서 말하는 '미러 뉴런'은 타인의 행동이나 감정을 볼 때 마치 내가 그 일을 겪는 것처럼 활성화된다. 하지만 한국인의 미러 뉴런은 더욱 특별하게 튜닝되어 있다. 우리는 고통의 주파수를 감지하는 안테나를 타고났다. 머리로 "저 나라 참 힘들겠네"라고 이해하기 전에, 가자의 폭격 소리에 심장이 먼저 조여들고 이란의 최루탄 연기에 눈시울이 먼저 붉어진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에서 "연민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시들해진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다. 그것은 내 몸의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듯한 통증, 즉 공감을 넘어선 환상통이다. 이 통증은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행동하라는 신호다. 이것은 고통을 겪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럽지만 가장 숭고한 '윤리적 감수성'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규정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피해자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그 모든 폭력과 죽음, 그리고 존엄의 파괴 시도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생존자다.
생존자라는 말에는 무게가 있다. 먼저 간 이들에 대한 부채감,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섞여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생존은 개인적인 행운이 아니라, 집단적인 책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나의 평화가 누군가의 피 위에 서 있음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이제는 내가 그들의 피를 닦아줄 차례임을 인정하는 것.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거창한 정치적 구호 이전에, 가장 인간적인 연대를 해야 한다.
그들과 함께 울자. 이것은 패배주의적인 눈물이 아니다. 당신의 고통이 나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연대의 눈물'이다.
그들의 증인이 되자. 권력자들은 언제나 기록을 지우고 역사를 왜곡하려 한다.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듯, 이제 우리가 저들의 진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갈색 눈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의 메신저가 되자. 고립된 채 죽어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 일상의 대화 속에 실어 나르자.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자.
우리는 모두 역사의 생존자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피 흘리고 있는 또 다른 '우리'에게 손을 내밀자.
그것이 살아남은 우리가 시대의 빚을 갚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