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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섬에서 만난 이방인

by 조하나


우리 다이빙 센터에서 며칠간 펀 다이빙을 하던 다이버가 있었다. 나와 다이빙을 하지 않더라도 함께 보트에 오르면 서로 얼굴이 익기 마련이다. 50대로 보이지만 아시안의 나이는 짐작하기 힘들다. 영어를 쓰는 우리 센터 다이브마스터들과 다이빙을 하기에 영어권 나라에서 온 듯했다. 다이빙 강사로 오래 살다 보면 기본적인 정보로 다이버의 성향이나 취향을 알 수 있다.


마침 함께 다이빙할 기회가 생겼다. 나이트록스 애널라이징을 안내했는데, 탱크에 다이버의 이름을 직접 써넣는 데에 ‘Kwon’이라는 한국식 패밀리 네임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인만 성을 ‘Kwon’으로 표기한다. “한국 분이세요?” 물었더니 놀란다. 그는 나를 한국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트에 올라 다이빙 준비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계 이민 2세대였고, 시간이 날 때마다 꼬따오에 와서 펀 다이빙을 즐긴다고 했다. 나는 그의 영어 이름을 불렀고, 계속 영어로 대화했다. 한국인 둘이서 영어로 대화하는 게 재밌다 싶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이민 1세대인 그는 분명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그에게 “한국어 하세요?” 하고 묻고, 한국어로 대화를 이어가면 어떨까 했다. 하지만 생각만 하다 말았다. 한국어로 대화 언어가 바뀌는 동시,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한국식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호칭부터 찾아야 하고, 알맞은 톤과 존댓말을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대화 내내 실수하지 않기 위해 긴장해야 한다. 그런 대화 자체가 피곤하고 머리 아프다.


나이차가 많은 한국인 중년 신사와 서로 이름을 부르며 캐주얼하게 대화할 수 있는 언어는 영어가 훨씬 나았다. 그가 살아온 삶을 잠시 들을 수 있었고, 앞으로 그가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 왜 다이빙을 좋아하고, 물속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는 데에 대화의 언어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대화의 언어를 한국어로 바꿨다면, 어쩌면 피어나지 못했을 이야기다. 한국어는 체면과 예의를 차리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언어다.


미국식 이름과 한국 성이 조합된 이름으로 한 세기의 반을 살아온 이 다이버는 자신을 한국인이라 인식할까, 미국인이라 인식할까,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걸까. 은퇴 후 태국에서 살고 싶다는 걸 보니 미국에서의 그의 삶도 변변치 않은 듯하다.


태국인도 태국이 아닌 것 같다는 작고 외딴섬에서 오래 살다 보니 여권 커버에 쓰인 국적이나 이름, 그리고 나이가 별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국적과 사회계층으로 얻은 힘은 그리 크게 통하지 않는 곳이다. 미국인이라고, 그렇다고 한국인이라 특별히 좋을 것도, 또 나쁠 것도 없는 이곳에선 우리 모두 이방인이다. 그러다 우리는 우연히 만나 바닷속에서 서로의 삶 한 순간을 나누고 또 헤어진다. 나는 이 단순한 삶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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