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달콤한 나의 도시> 드라마 엔딩이 좋았던 건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함께하지 않는 걸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드라마를 본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이따금 ‘지금의 은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동화책, TV 드라마, 영화는 대부분 ‘Happily Ever After’로 끝났다. 누구도 ‘그 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잘 다니던 패션지 때려치우고 태국 외딴 시골 섬으로 떠난 다이빙하는 에디터’, 역시 근사하고 그럴듯한 엔딩이다. 주사위 게임을 잘하는 방법은 주사위를 아예 최대한 멀리 던져버리는 것이라는 영국 속담을 실행에 옮긴 나는 ‘별은 별빛을 찾는 사람을 위해 빛난다’는 순수한 낭만을 마음에 품고 이 섬에 들어왔다. 그리고 8년이 지났고, 난 운 좋게 여전히 이 섬에 있다. 사람들이 소위 ‘파라다이스’라 부르는 곳에 휴가도, 한달살기도 아닌, ‘눌러살기’로 수년을 살아오며 가장 크게 배운 건, 천국과 지옥은 내 마음에 있고 어딜 가든 누구와 있던 어떤 환경에 있든, ‘나, 나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금’도 ‘똥’이라는 것.
번아웃이 왔다. 오랜만이다. 전에도 겪어봤다. 팬데믹 이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다이빙 센터에서 다이빙 강사로 일할 때다. 파라다이스에서 바다를 사무실로 일하는 다이빙 강사가 번아웃이라니,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낭만 뒤엔 현실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시스템을 벗어나 살아갈 수 있는 티켓값을 끝내 치러야 한다. 다이빙을 진지하게 하려면 정말 집에 돈이 많아야 한다고, 다이빙 강사들끼리 모일 땐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는데, 4대 보험도, 퇴직금도, 연차도 없는 다이빙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만큼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의미다. ‘파라다이스’에서도 나는 열심히 일했다.
팬데믹의 시작과 끝을 이 섬 꼬따오에서 함께 한다. 그 시작과 끝 지점 사이 나는 멕시코에, 그리고 한국에 있었다. 팬데믹의 한복판이었던 작년 5월, 이 섬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 6개월은 텅텅 빈 섬에서 설렁설렁 지냈다. 그러다 작년 말부터 조금씩 바빠지기 시작하다 최근까지 광란의 6개월을 보냈다. 블로그 포스팅은 10년이 넘게 꼬박꼬박 하던 나도, 다이빙을 자주 하고 코스가 많아지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보스가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꽤 큰 그룹의 강사 과정 코스를 나 혼자 2주간 끙끙대며 끌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중압감과 스트레스의 영향이 컸다. 세계 곳곳에서 온 친구들이 한 곳에 모여 같은 꿈과 목표를 가지고 함께 달린다는 걸 달리 표현할 수도 있겠다. 제각각 다른 곳에서 온 만큼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이 충돌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강사 과정 코스 자체가 2주간 달려야 하는 마라톤 같다. 강사 지원자들 저마다 스트레스 레벨도, 스트레스를 다루는 방법도, 표출하는 방법도 다르다.
혼자서 둘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기도 했고, 강사 과정 코스가 전문가 코스이다 보니 보스의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을 찾기도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강사 개발 과정은 이후 이틀간 치러지는 강사 시험 결과로 성공 여부가 분명히 나타나는 코스다. 트레이너로서의 중압감과 스트레스 역시 엄청나다. 스태프 강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제각각 국적이 다른 다섯 명의 다이버의 인생을 바꿀 코스를 가르친다는 건 특히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아직 갈 길이 더 남았구나. 더 배워서 더 나은 다이버, 더 나은 트레이너가 되어야겠다... 이렇게 키보드로 문장을 입력한 순간, 내 오른쪽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나는 언제부터 또다시 ‘더’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된 거지. 이 단어를 안 쓰려고, ‘더, 더, 더’ 하지 않으려고, 가지려 애쓰지 않으려고 한국을 떠나 이 섬까지 온 건데.
이 섬에서의 대부분의 날은 좋다. 많은 날 아침이 이유 없이 기분 좋고, 일상 모든 게 감사하다. 눈 뜨면 눈앞에 바로 펼쳐지는 바다에 스쿠터로 5분이면 도착하는 직장에, 그것도 바다로 뛰어드는 일을 한다. 이 섬은 나 같은 불평꾼도 항복시키는 곳이다. 불평할 게 없다. 현재가 이리 밝으니 내일을 생각할 이유도, 걱정할 이유가 없다. 오늘의 꽤 괜찮은 바이브가 내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파라다이스에서의 번아웃이라. 모순되게 들리겠지만 파라다이스엔 번아웃이 꼭 필요하다. 평생 먹고 노는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그렇다면, 일론 머스크나 마크 저커버그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나. 행여라도 부자가 되면 섬 하나 사서 평생 먹고 놀아야지, 했던 나도 이 섬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걸 일주일 이상을 못 한다. 최대 일주일이다, 나에게는. 트로피컬 파라다이스 아일랜드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노는 것도 한계가 있다. ‘노동’ 없이 파라다이스에서 오랫동안 이어지는 삶은 없다.
어째 지난 1년 별 탈 없이 꽤 잘 버텼다. 모험 찬 팬데믹을 경험했으니 스스로 칭찬할 만하다. 그래도 다이빙을 하며 이 섬에 사니 망정이지, 서울서 일하며 먹고 살 땐 이런 권태를 한 해에도 여러 번, 더 자주 겪었더랬다. 하루에 서너 시간을 갖다 바친 지하철 안의 시간에서, 맛있는 점심 한번 먹어 보겠다고 식당 앞 긴 줄을 선 선배 눈치를 보며, 점심을 다 먹고 아아를 쪽쪽 빨며 제시간 맞춰 제각각 회사로 들어가는 직장인들을 보서, 이건 뭐, 교복만 안 입었지, 고등학교의 연장이네, 했던 투덜거림에서, 나는 점차 흔해빠진 시니컬한 도시인이 되어갔다.
도시 사람들은 ‘파라다이스’를 번아웃의 일시적인 치료제로 찾는다. 그럼, 파라다이스에서 번아웃이 오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그 순간, 우리 집 발코니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연 색깔로만 꾸며진 야자수와 바다 풍경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주체할 수 없는 무기력과 권태가 나를 덮쳤다. 무작정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카오톡 전화를 처음 받아본다며 중얼거리는 아빠에게 무작정 질문부터 던졌다. “아빠는 인생 지겨워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아빠는 몇 초 쉬었다 기가 찬 웃음소리를 내더니 “쇼핑을 해, 인마” 했다. 나는 말했다. “아빠, 나, 여기서 필요한 게 정말 없어…”
이 섬엔 ‘셀럽’도, ‘부자’도 온다. 얼마 전, 미국에서 우리 다이빙 센터로 팀티칭 교육을 받으러 온 강사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석유부자의 아들이다. 꼬따오에 공항이 있었다면 개인 전용기를 타고 왔겠지. 다이빙 장비 가지고 비행기 타는 게 다이버 인생 절반의 스트레스인데 그런 걱정 안 해서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섬에선 셀럽도 부자도 소용없다. 일단 셀럽은 아무도 못 알아본다. 행여 알아보더라도 대부분 못 본 척하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준다. ‘부자’도 이 섬에서 의미가 없다. 원한다면 티셔츠 한 장, 반바지 하나로 살 수 있는 곳이다. 태국 큰 명절 쏭크란 때 방콕 부자 힙스터들이 각종 스포츠카를 가지고 이 섬에 들어왔는데 이곳저곳에서 주차할 곳도 못 찾고, 차를 몰고 다닐 길조차 못 찾아 끙끙대며 웃음거리의 대상으로 섬 이곳저곳에서 눈총 받으며 민폐만 끼치다 갔다. 전직 때문에 알았던 패션 쪽, 연예인 친구들도 나를 보러 이 섬에 몇 번 왔다 갔는데, 여기는 자신을 알아보고 사진 찍자는 한국인 없어 너무 좋다고 한다. 그럼 나는, 한국에서 사고 치고 숨을 곳 필요하면 와, 하고 농을 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알아보는 사람 없다며 좋아하던 연예인도 일주일만 지나면 더 이상 못 버틸 거란 걸. 사람들의 관심 없인 지속될 수 없게 디자인된 직업이다.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 섬엔 부자도 얼마 못 가 떠난다. 코사무이나 푸껫 같은 보다 거대하고 도시화된 섬으로 옮긴다. 그래야 자신의 차를 자랑하고, 옷을 자랑하고, 신발을 자랑할 수 있으니까. 일 년 내내 플리플랍 하나, 혹은 맨발로 사는 사람들에게 프라다든 샤넬이든 루이비통이든 다 거기서 거기인 거다. 부자들은 이 섬에 오면 재미가 없다. 돈도, 인기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더 욕망한다. 이 세상 덩그러니 혼자 남은 사람이 자신을 치장하고 SNS에 사진을 올리진 않겠지.
욕망이 없는 삶은 지루하다. 쫓을 게 없기 때문이다. “쇼핑을 해, 인마” 하는 아빠의 말에 동남아시아의 아마존 ‘라자다’에 들어갔다. 웹사이트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릴 적 하던 게임, 호루라기 불고 10초 세는 동안 각자 짝을 찾는 게임에서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이 든다. 여기서 나는 살 게 없다. 필요한 게 없다. 사고 싶은 것도 없다. 욕망의 상징이자 자본주의의 꽃, 패션지에서 일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다. 정말, 여기 사는데 필요한 게 그리 많지 않다.
이 섬에 오래 산 외국인 중 은근히 심술쟁이 ‘그럼피’가 많다. 대부분 나이 든 유러피언, 백인 남성들이다. 이 섬이 90년대 말 유러피안 배낭 여행객들 사이에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나와 같은 선택을 했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까지 쭉 여기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그럼피한 기운과 젊은 배낭여행자들의 가져오는 새로운 바이브가 만나 이루는 묘한 이질감, 그리고 동질감이 있다. 이 섬을 받치고 지탱하는 끈끈한 커뮤니티를 베이스로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이 흘러들어온다. 아름다운 순환이다. 누군가는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고, 누군가는 아주 오랫동안 눌러앉는다. 이런 분위기가 꼬따오, 이 섬의 보석 같은 매력이다.
그런데 팬데믹으로 그 순환이 멈췄다. 순환이 안 되고 고이기만 하면서 대부분 섬사람들은 ‘그럼피’가 되어갔다. 무기력으로 가득한 파라다이스는 어쩌면 지옥보다 더 끔찍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그럼피’에 속하지 않는가, 반문해본다. 새삼스럽게 돌이켜보면 나는 욕망 덩어리인 패션 잡지에서 욕망 없는 삶을 부르짖다가 결국 그 삶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욕망 없는 삶이 주는 모순이다, 나는 도시인의 파라다이스 버전, ‘그럼피’가 되어 가고 있진 않은가, 스스로 묻는다.
“아니면, 멕시코로 다시 가든가.” 아빠는 툭툭 던지는 말처럼 들려도 가끔 나를 찌른다. 내가 멕시코 다시 가고 싶은 건 어떻게 알았지. 8년 전, 내가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굉장히 비장했던 나에게 “가서, 안 되면 그냥 와”했던 아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나는 잘 안다.
“안 되면 그냥 돌아와, 괜찮아”하는 그 말이 나에겐 큰 산 같았다. 꼭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내가 하는 모든 결정, 행동, 그 외의 것들조차 의미를 부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는, 가만히 또 호흡을 고른다. 이 섬에서 내가 꽤 많이 바뀐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그것도 아니네.
생각은 어두운 길로 흐른다. 다른 이가 보는 내 삶과 스스로 느끼는 내 삶 사이의 괴리감이 컸다. 그래서 이 섬으로 떠나온 건데, 이젠 되레 정말 이러다 내가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기묘한 종류의 불안을 느낀다. 나는 조용하게, 이 세상에 없는 듯 살고 싶다가도,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길 바라고, 내 이야기에 관심 두길 바라는, 아주 모순적인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사람은 변덕스러워야 돼.” 아빠가 또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글들을 쭉 훑어봤다. 그중에서도 재밌는 건, 이 섬에 들어와 산 지 고작 2~3년 되었을 때도 나는, 권태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는 거다. 파라다이스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번아웃, 그리고 권태가 한 번 파도처럼 들이밀고 나면, 이제 쭉 다시, 빠질 차례다.
꼭 초심이란 걸 지켜야 하나. 나는 왜 다이빙을 어느새 또다시 서울에서 하던 그 일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나. 순수하게 재밌어서, 행복해서 시작한 건데 왜 또다시 이걸 내 인생을 건 대형 프로젝트인 양 생각하는 걸까. 하루하루, 꼬박꼬박, 지금처럼, 한 걸음씩 걷다가, 가끔은 있고 싶은 만큼 쉬었다 가고, 맘에 드는 곳 있으면 며칠, 몇 달, 몇 년 지내다 가보고, 그렇게 어딘지 모르게 가다 보면 또 다음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을까. 설령 앞이 캄캄하더라도, 내가 그쪽으로 가는 길을 처음 만들었다는 데 의미가 있겠지. 아이코, 나는 아직 멀었다. 여전히 그놈의 의미 타령이라니.
사명을 찾겠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야겠다. 좋아해서 빠져든 무언가가 ‘일’이 되었다고 해서,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일인지 의심하는 것도 그만둬야겠다. 일에 꿈이나 정체성, 열정을 억지로 욱여넣고 합리화하려는 고집을 아직도 못 버렸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