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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다이빙

불안은 실행으로 덮는다.

by 조하나



다이빙 업계는 글로벌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 작은 섬 꼬따오 인구 반 이상이 서유럽, 영국, 미국에서 온 외국인 다이빙 강사였다. 코로나가 끝내 이 작은 섬까지 먹어 삼키자 버티다 버티다 사람들은, 결국 하나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렇게 텅- 빈 섬으로, 그것도 팬데믹의 한가운데 돌아온 내가, 가진 것도, 그래서 잃을 것도 없는 내가 이 섬으로 돌아오며 품은 생각은 ‘그래도 언젠간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이었다. 하도 희미한 희망이었지만, 인간이라는 종은 격리 생활 최대 2년을 버티지 못할 거란 시니컬한 조소 같은 거였다.


팬데믹에 열흘의 격리도 불사하고 이 섬에 돌아온 건 다이빙으로 돈은 못 벌어도 다이빙은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년 연말부터 조금씩 바빠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전 끝낸 여름 시즌은 꽤 바쁘고 정신없이 보냈다. 갑자기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팬데믹 이전 상황이 된 건 아니었다. 태국이나 발리 등 동남아 관광 산업이 팬데믹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린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내가 바쁜 이유는 팬데믹 동안 일이 없어 이 섬을 떠난 강사들이 많아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팬데믹으로 감축한 항공 승무원 인원을 늘리지 않은 상태에 비행 운항이 다시 늘기 시작하면서 같은 인원수의 승무원이 일을 배로 하는 것과 비슷하다.


팬데믹 이후, 확실히 여성 다이버나 교육생이 줄었다. 최근 내가 가르친 학생들의 성비만 봐도 1:9다. 한동안은 다이빙 강사 과정 학생들이 연속 3달 남자였던 적도 있다. 팬데믹은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끼쳤을까? 팬데믹으로 더 많은 수의 여성이 직장을 잃었다. 팬데믹에 자르기 좋은 비정규직, 계약직 여성 비율이 더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택 근무 장기 시행으로 여성이 집에서 역할이 더 커졌다. 회사에 못 가는 남편은 자택 근무로, 어린이집에 못 가는 아이들도 집이다. 여성이 팬데믹에 다이빙을 위해, 여행을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기로 마음먹는 건 남성보다 더 어렵다. 사람들은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를 말하지만, 인생이 공평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이 섬을 사랑하는 이유는 팬데믹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웃도, 군부 쿠데타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는 미얀마 사람들도, 모두 이 작은 커뮤니티에서 마음을 모아 서로 돕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서로 간의 국적이 가장 다양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이리 평화롭고 아름다운 커뮤니티는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이 섬에서 우린 모두 외국인, 외계인,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더 조심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이 섬에서 ‘가난’과 ‘부유함’의 경계는 흐릿하다. 포르셰를 이 작은 섬으로 몰고 들어와 주차할 곳 하나 못 찾고 낑낑대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안쓰럽기까지 했다. 작은 스쿠터 한 대로 온 섬을 30분 이내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니 포르셰도 여기선 포르셰가 아니다. 올해 내가 신은 신발은 플리플랍 한 켤레가 전부다. 대부분 맨발이다. 지미추 구두가 이곳에선 애물단지가 된다.


팬데믹으로 인해 나를 비롯한 동료 다이빙 강사들은 더 이상 바쁘다고, 일이 많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다이빙은커녕 집 밖을 나올 수조차 없었던 수많은 날을 보내고 다시 이 섬으로 돌아온 유러피안 친구들은 더 그렇다.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과 유한함을 경험했을 때 잠시 겸손해진다. 우리는 자연을 다루는 일을 한다. 바다 안에 사람을 데려가 그곳을 두루두루 소개해준다. 마치 바다가 허락이라도 했다는 듯. 그래서 나는 좀 더 겸손해지기로 한다.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가진 자연 앞에 감사하고 겸손하며, 그를 빌려 밥을 벌어먹는 다이버를 어여삐 여기십사, 기도한다.


팬데믹은 나를 반은 사람이 싫고, 반은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람 때문에 외롭지 않고, 또 사람 때문에 외롭다. 이 섬에 오래 살다 보면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에 익숙해진다. 나는 늘 여행 다니고 떠돌아다니는 사람. 우리 엄마, 아빠에게 나는 ‘떠나는 사람’인데, 이 섬에서 나는 ‘보내는 사람’에 더 익숙해진다. 몇 주, 몇 개월, 몇 년, 정들었던 친구들이 이 섬을 떠나면 한동안 마음을 앓곤 했다. 이것도 해보면 느나, 보내는 감정도 점점 익숙해진다. 매일매일, 메일을 열어보는 기분이 딱 그렇다. 누군가로부터 나를 찾는 메일이 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 아무것도 답장할 게 없었으면 하는 귀찮은 마음 반, 정확히 딱 반반이다. 인스타그램을 열 때도, 페이스북을 열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를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 반,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 딱 반반.


팬데믹 동안의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가 격리를 꽤 잘 버텨냈다고 생각하는 나는 내가 그렇게 사람을 좋아했던 이십 대에 팬데믹을 겪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한창 바깥세상이 궁금할 스무 살에 3년간의 마스크와 거리두기, 재택수업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그래, 무기력이다. 무기력.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관광 및 여행 산업의 범주에 들어있는 나는 바로 이 무기력함과 싸웠다. 우리 모두 느낀 감정은 무기력이 적확할 것이다.


이 외딴 작은 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과 만나야만 가능한 일, 다이빙으로 아직 내가 먹고살고 있으니 이 또한 별일이다. 우리 모두 각자의 무기력함과 옥신각신하며 버텨낸 ‘생존자’들이다. 그러니 너도 안 됐고, 나도 안 됐다. 그러니 이제 우리 살아남은 자들끼리라도 서로 존중하고 도와가며 살면 안 될까. ‘전쟁’과 ‘핵’이라는 단어가 매일같이 뉴스에 나오는 세상, 그리고 어디선가는 여전히 전쟁 중인 세상, 글로벌 팬데믹을 이제 막 겪은 우리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건가. 나는 그동안 코로나를 핑계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지나쳐 보냈는가. 내가 사는 태국엔 ‘엔데믹’ 이야기가 서서히 흘러나오는 가운데, 나에게 다시 주어진 두 번째 기회, 나는, 우리는, 이번엔 잘할 수 있을까?


나는 불안 앞에 담대히 서, 불안을 실행으로 덮는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오늘도 눈앞의 예상 못할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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