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the dream’이라는 판타지에 대하여.
자유의 나라 태국,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인 건 10년 전, 살기로 작정한 게 8년 전이었다. 태국 남동부 외딴 작은 시골 섬 꼬따오, 섬 밖의 사람들이 ‘파라다이스’라 부르는 이곳에서 지난 수년간 유러피안들과 다이빙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정말 ‘파라다이스’에서 살고 있을까. 의문을 품고 들여다보고 쓰는 게 이 생에서의 내 일이다.
이 섬엔 ‘비비’라 불리는 트랜스젠더가 오랫동안 운영해온 미용실이 있다. 가끔 그녀는 페이스북에 손님들에게 당한 차별을 하소연하곤 하는데, 일부러 그녀를 찾아가 머리를 자르는 척하며 의도적으로 그녀를 모욕하는 건 대부분 백인 유러피안 남성들이다. 마크 트웨인이 그랬다. 당신이 모르는 것이 당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확실히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그렇게 만든다고. 자신이 고등 교육을 받고, 뭘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스스로 인지조차 못 한 채 누군가에게 그렇게 폭력을 휘두른다.
당신이 이성애자에 신체 및 정신적 장애가 없고, 한 부모 가정에서 자라지 않고, 아동 학대나 성폭력을 한 번도 당하지 않고, 당신의 부모 모두 국적이 같고, 한국에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면, 그것은 당신의 선택도 능력도 아니다. 당신은 그저 한 인간으로서 받아 마땅한 보통의 권리를 존중받으며 살아온, 아주 운 좋은 경우에 속할 뿐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나의 허락이 필요치 않다. 내가 이해하고 허가하고 말 일이 아니다. 해외에서 한국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로 살며 피부 아래 곳곳까지 느끼는 ‘약자’ ‘소수자’ ‘취약계층’으로서의 삶은 ‘파라다이스’와 ‘Living a dream’이라는 판타지를 팔며 살아가는 다이빙 강사로서 더욱더 모순적이다.
나 역시 재미있는 인간이다. 한국에서 잡지사 기자로 사회생활을 할 땐 나보다 잘 살고 돈 많고, 또 돈 걱정할 필요 없는 강남 사람들을 주로 대하다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쳤더랬다. 한데, 이 섬에 들어와 보니 정답이 나왔다. 지구에서 가장 특혜를 받는 건 ‘영어’를 쓰는 ‘영미권’ 출신 ‘백인’ ‘남성’이다. 전 세계에서 모인 여성 다이빙 강사들은 이따금 이런 슬픈 농담을 주고받곤 한다. “다음 생엔 백인 남성으로 태어나고 싶다”라고.
피부와 언어, 성별로 인해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부여받는 권력은 이 작은 시골 섬 곳곳에도 뻗어있다. 미국에선 아시안을 무시하고, 한국에선 태국인을 무시하고, 태국에선 미얀마인을 무시한다. 하지만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섬에서 한국어를 쓰며 한국인 커뮤니티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쓰며 웨스턴 커뮤니티 안에서 살아가는 데엔 나름 이유가 있다.
얼마 전 내가 트레이닝 한 덴마크에서 온 크리스천은 자신이 남아공에서 겪은 경험을 들려줬다. 흑인이 대부분인 마을의 슈퍼마켓에 자신과 친구가 들어갔는데, 물건을 사거나 계산하는 걸 거부당했다고, 자신이 백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순간, 머리가 띵 했다. 나는 여태 ‘인종차별’은 백인이 라틴계와 흑인에게, 라틴계와 흑인이 아시안에게만 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인종차별은 ‘백인 아홉에 흑인 하나, 혹은 흑인 아홉에 백인 하나’ 같은 것이었다.
내가 다이빙을 영어로 배우고 영어로 가르치는 이유는 언어의 권력 때문이다. 글로벌 다이빙 단체는 모든 정보 업데이트를 영어로 가장 먼저 한다. 이후 짧게는 서너 달, 길게는 몇 년 후에야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다. 매년 멤버십 비용을 똑같이 내는데도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쓰는 언어에 따라 달라진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친구들에게 “넌 좋겠다, 전 세계 어딜 가나 영어만 해도 먹고살 수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한국 애들이 영어 교육에 투자하는 비용만 해도 얼만데…”라며 나의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에서 기인한 볼멘소리를 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에 기대어 살아왔는데, 요즘은 ‘가오가 없어도 돈 있으면 장땡’인 사회로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고 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에 사는 석유 부자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시대다.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평등해졌다는 위안에 따라오는 부산물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진짜 잘 사는 사람이 어떤 물건을 쓰고, 어떻게 사는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그럴수록 욕망과 박탈감, 영웅심 혹은 반항심은 더욱더 강해진다. 하지만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정말 평등해졌을까? 땅, 주식, 재개발, 신사업, 가상화폐까지, 어떤 정보는 여전히 막강한 특권이 있어야 접근이 가능하다.
태어나면서부터 돈을 좇도록 학습되고 길러진 우리 아이들은 자신의 기조나 신념을 자라게 할 시간도, 여유도, 여력도 없다.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라고 자식들에 큰소리치면서, 온갖 차별에 반대한다고 열렬한 온라인 댓글을 달면서도,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청소노동자 뒤에서 “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커서 이런 일 한다” 하고 말하는 한 엄마는 아이의 인생에서 공부를 돈으로 너무 쉽게 치환해버린다. 그리고 인격 존중에 대한 교육 역시 돈 때문에 포기하고 만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존감은 없고 자아만 커진 어른으로 자란다.
삼성 이재용이 그 큰 죄를 짓고도 왜 사면이 되었는지는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한 엄마다. 공부를 ‘열나게’ 해서 주택공사 들어가 투기한 사람과 조국 사태에 분노하며 공정을 부르짖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면? 권력 기관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무슨 일이 터지면 경찰, 검찰에 아는 사람 있는지부터 찾는 우리, 보통 사람들.
우리는 태어나 돈을 위해 한평생 달리다 간다. 있는 이와 없는 이 사이 분열의 헤게모니에 “땡큐”하는 정치인들의 배만 불어난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동성애 키스신은 삭제하면서도 개차반 막장 드라마 <펜트하우스> 시청률은 고공행진인 이상한 사회. 쿠팡 배달 노동자의 죽음에 분노하면서도 쿠팡 상장 소식에 환호하는 사람들. 여성 차별에 반대한다고 부르짖으면서 뒤에선 여성 기득권으로 남성의 그것에 동조하거나 눈을 감아주는 여성들. 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끔찍하고 재미없고 비생산적인 사회인가.
미국에서 아시아인에게 욕하는 백인과 한국에서 배달원을 못 들어오게 막는 아파트 입주민이 뭐가 다를까. 바다를 사랑한다는 다이버가 바다를 자유로이 헤엄쳐야 할 물고기를 가둬 놓은 아쿠아리움에서 다이빙하며 셀피를 찍어 인스타에 올리는 것과 뭐가 다를까. 기득권을 혐오하면서도 기득권이 되고자 욕망하는 사람들. 혐오와 차별, 폭력은 학습과 교육에서 시작된다.
역사는 택배기사에 의해 쓰이지 않는다. 팬데믹으로 해고되어 일용직 노동일을 하는 청년이 팬데믹으로 문 닫은 가게 철거 작업을 하는 아이러니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역사는 그 청년의 심정을 기록하지 않는다. 성차별, 인종차별, 종교 차별, 세대 갈등, 모든 갈등의 한가운데에서 가련한 우리는 도무지 화를 어디에 내야 할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질투는 자격지심에 뚜렷이 기인한다. 다이빙 강사 생활 내내 나는 내 다이빙 스킬과 카리스마로 인정받고 싶었다. 잘 빠진 몸매나 웃음이 아니라 그저 드라이하게 내 실력만으로 받는 인정. 그저 남들 같은 인정. 한국인 커뮤니티는 더 그렇다 들었다. 웨스턴 커뮤니티에도 여성 다이버는 많지 않다. 있어도 ‘눈요기’처럼 여겨진다.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에 대해선 떠들어도, 아무도 그녀의 다이빙 스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에서 오래 산 부부의 비결 같은 인터뷰를 봤다. 남편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올 때 와이프를 위해 변기 뚜껑을 내리고 나오고, 와이프는 반대로 남편을 위해 변기 뚜껑을 올리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작은 배려 같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 견고해지는 것이 ‘리스펙트’의 진정한 의미이다. 나는 그런 리스펙트를 받고 싶다. 여자라고 보호를 바라지도 않고, 여자니까 더 인정받길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똑같이, 당신과 똑같이, 그런 리스펙트를 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작은 섬에서의 하루는 느리고, 일 년은 빨리 간다. 캐나다에서 온 내 친구는 팬데믹 동안 엄마가 되었다. 사실 그녀를 보며 나는 시간에 덜컥 겁을 먹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밀려 나간다. 만남과 이별에 굳은살이 박여가고, 사람을 떠나보내는 게 익숙해진다. 게을러지기 쉽고, 현실감각을 잃기 쉬운 곳, 피터팬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이곳은 오래 살고 보니, 그런 섬이다.
행복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파라다이스’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처음 이 섬에 올 땐 나도 그랬다. 모두에게로부터 행복을 바랐다. 수년이 지나 요즘에야 서서히 깨닫고 있다. 이곳은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온갖 문제들을 들고 들어오는 섬, 사람들은 제멋대로 기대하고 제멋대로 실망한다. 나는 이 섬에 무엇을 기대하고 또 무엇을 실망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행복해지려, 시도해보고 있는 사람들. 나는 이 섬에서마저 여전히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한다.
물속 세상에서 우린 모두 똑같다. 당신이, 그리고 내가, 어느 나라에서 왔건, 무슨 일을 하건, 돈이 얼마나 있건,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얼마든, 성적 취향이 어떻건, 우린 모두 바닷속에서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다. 남을 위한 선택을 앞세웠던 삼십 대 전과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을 우선했던 삼십 대 이후, 내 삶의 질은 크게 달라졌다. 삶을 바라보는 눈을 말도 못 하게 크게 넓혀준 건, 다이빙 이후의 시간이었다. 태어나서 삼십 대까지의 삶은 한 권으로 쓸 책이라면, 삼십 대 이후 지금까지의 삶은 다섯 권은 쓸 수 있을 거다. 그만큼 삶이 심플하고 비워질수록 삶은 더 농밀해진다. 농도는 더욱 짙어지고, 밀도는 더 강해진다. 나는 ‘파라다이스’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파라다이스’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만하면, Why Not? Living the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