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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아빠

불현듯 닥친 시간의 공포와 마주했다.

by 조하나


코로나19 글로벌 팬데믹 선언 직전, 이 섬을 떠나 한국을 거쳐 멕시코로 갔다. 신천지로 들끓던 한국의 초기 코로나 상황을 겪고 멕시코에 갔는데 거긴 딴 세상이었다. 그곳의 코로나는 아직 맥주 이름일 뿐이었다. 코로나의 검은 그림자는 언제나 한 발 느린 걸음으로 나를 끈질기게 쫓아왔다. 결국 지구 한 바퀴를 도는데 시간이 조금 지체된 것뿐, 한 달 후 멕시코 역시 코로나에 시름을 앓았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팬데믹에 한국으로 돌아올 비행기가 없어 전전긍긍하며 기다리다 겨우 오른 귀국행 비행길에서 나는 반년간의 멕시코 생활의 긴장과 불안을 깊은 한숨으로 내뱉었다.


‘집이다, 드디어 집에 간다.’


엄마와 아빠가 있는 집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돌아갈 집이 없다는 건, 돌아갈 엄마와 아빠가 없다는 건 어떤 암흑과 절망의 기분일까. 내가 어릴 적 할아버지가, 내가 머리가 좀 크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 아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팬데믹 한가운데 돌아온 한국, 그리고 집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둥지가 되어주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와 가장 긴 시간을 함께했고, 엄마가 해준 밥을 가장 많이 먹었다. 오래 묵은 엄마에 대한 원망, 미안함, 어색함이 한 겹씩 녹아내렸다.


그 와중에도 다툼은 이따금 이어졌다. 여전히 나는 어린 시절 엄마의 부재로 받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중이었고, 엄마 역시 이따금 터져 나오는 그대의 상처의 잔상 앞에 종종 약해졌다. 그렇게 대판 말다툼이 끝나면 엄마는 말없이 한 상 밥을 차렸다. 그게 엄마가 아는 유일한 딸과의 화해 방법이었다.


엄마의 삶을 바로보기 시작한 건, 그리고 그 삶을 안쓰럽게 여기기 시작한 건 내가 집 밖으로 뛰쳐나가 넘어지고 부딪히며 겪은 삶의 쓴맛 때문일 것이다. 고졸인 엄마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초등학생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마주한 사회와 세상은 절대 친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차별’ ‘남녀평등’이라는 용어나 개념조차 한국 사회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이제 겨우 30대 초반 어린 엄마였던 그대는 얼마나 많은 무시와 차별을 참으며 견디고 버텼을까.


시골집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똑똑했지만,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학에 진학할 꿈도 못 꿨던 ‘고졸’ 엄마는 명문대를 나온 아빠와 결혼하면 밥은 안 굶고 살겠지, 했단다. 그렇다고 엄마는 그 시대 만연한 생각처럼 ‘여자는 집에서 밥이나 하고 애나 보지’하는 ‘특혜(현대 여성에겐 이조차 특혜이고 사치가 되어 버렸다)’조차 누리지 못했다. 아빠는 성실한 가장이 아니었고, 다정한 남편도 아니었다. 아빠 역시 아빠의 엄마, 아빠로부터 얻은 감정의 밑천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집살이,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부딪히기만 하는 가족, 엄마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다. 온 마을은 고사하고 술주정하는 시아버지와 욕을 입에 달고 살며 딸 하나밖에 못 낳았다는 시어머니의 구박과 잘난 아들 데려갔으니 돈 내놓으라는 겁박에 시달리며 나를 키워낸 엄마. 아주 어렸을 때 엄마는 끝내 내 손을 잡고 집을 뛰쳐나와 고모 집으로 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모는 나를 잠깐 맡아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거절했고, 갈 곳 없던 엄마와 나는 차가 쌩쌩 지나다니는 한겨울 길거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엄마는 길거리에 서서 내 손을 잡고 서럽게 오래도록 울었다. 엄마는 나를 버리려고 한 걸까. 그때의 어린 나는 엄마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며 원망을 퍼부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섬에 있는 한 친구는 팬데믹 동안 임신 후 아이를 낳았다. 다이빙 강사였던 그녀는 임신으로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다이빙 일을 그만둬야 했고, 있긴 하지만 서포트를 전혀 하지 않는 남편 때문에 지금도 하루 24시간 수면 부족으로 퀭해진 얼굴로 온라인으로 영어를 가르치며 한 살 된 아이를 먹여 살리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그녀가 얼마나 아름답고 생기로웠는지 나는 기억한다. 그녀는 대부분 절망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지만 딸애 얼굴만 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는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엄마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나를 어떻게 이 머나먼 태국까지 보낼 생각을 했나 모르겠어. 이렇게 귀하고 소중한 딸을.” 또 한 번 나는, 타인의 모성을 절대 얕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엄마가 대학에 가고 더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엄마가 좋아하는 것을 탐구하고 시도해볼 기회를 얻었다면 달라졌을 이야기다. 당장 생활비를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던 엄마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빠에 대한 원망에 어쩌면 나에 대한 원망까지 겹쳤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엄마를 이제 책망하지 않는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나 역시 엄마를 많이 미워하고 원망했다. 나와 엄마의 싸움은 자연스레 엄마와 아빠의 싸움으로 번졌다. 이제 와 생각하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각자 주어진 삶을 소리 지르고 버둥대며 시끄럽게 살아갔을 뿐이다.


평생 일하며 고생한, 꽃 좋아하는 엄마가 나를 다 키워낸 후, 자신만의 정원이 있는 시골집에서 꽃밭을 가꾸며 사는 게 얼마나 큰 안도와 위안인지 모른다. 평생 단련되고, 뼛속까지 벤 생활력으로 엄마는 귀농 생활마저 하드코어로 바꿔버린다. 하루도, 한시도 쉬지 않고, 잡풀을 베든, 꽃을 심든, 동네 사람들을 챙기든, 뭐든 늘 한다.


삶의 무게를 오래도록 지고 살아온 한 여자. 그리고 그걸 평생 안타깝게 지켜봐 온 그 여자의 아빠. 외할아버지가 며칠 전 세상을 떠나셨다. 작년 내가 한동안 한국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만 해도 매일같이 우리 집에 오셔서 농사일을 도우셨다. 한사코 말리는 자식들의 걱정에도 고집을 부리셨다. 팬데믹 동안 역시 나는 내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외할아버지와 보낼 수 있었다. 평생 자식 신세 안 지셨고, 또 가시는 길도 그리하시겠다고, 병원비를 현금으로 당신 바지 주머니에 몰래 넣어놓고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엄마는 맏딸답게 씩씩하게 장례를 치렀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것저것 장례와 발인 절차를 정신없이 설명하는 엄마를 멈춰 세우고, “엄마 기분은 어때?”하고 물었다. 엄마는 당황했다. 아무도 엄마에게 엄마의 기분을 묻는 사람이 없었을 게다. 침묵이 흘렀다. 엄마는 더듬더듬 자신의 기분을 들여다보는 듯 했다. 침묵을 깬 엄마는, 아직 실감이 안 난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매일 매일 살아갈 일상에서 딸네 집에 와 풀을 베던 아빠의 모습이 문득문득 떠올라 그리워질 거라고 했다.


평생을 세상으로부터 ‘독하다’는 말만 들어왔던 엄마는 엄마의 아빠에겐 여리고 가엽고 기특하고 자랑스럽기만한 딸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평생을 지켜본 아빠를 떠나보내고, 자기 딸과의 통화에서 엄마는 결국 오열했다. 부모를 잃는다는 건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이 순간까지 내 삶의 전부를 알고, 기억하고, 애처로워하는 이를 잃는 것일 게다. 내 삶의 일부를 잃는 것일 게다. 엄마의 슬픔을 더 가까이에서 함께 해줄 수 없는 미안함에, 헤아릴 수조차 없는 그 상실의 아픔에 나도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와 나는 풀 베던 모습마저 점잖던 따뜻하고 인자한 그분의 모습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지금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시골 동네 노인들과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돕는 자원봉사 일을 하면서도 당신이 훗날 그리되면 어쩌나 걱정에 한숨인 엄마. 엄마와의 과거에만 갇혀 살다 이제야 앞으로 닥쳐올 시간에 덜컥 겁을 먹어버린 나는, 엄마의 집, 엄마의 정원, 엄마의 아빠, 엄마의 시간, 엄마의 일생에 대해 생각한다.


멕시코로 가던 나를 공항까지 차로 바래다주며 처음 눈물을 보였던 엄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엄마 많이 늙으면 내가 모시며 농사지을게. 그러니까 외로워하지 마,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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