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김장을 했다.
첫 번째 김장은 이주일 전이었다. 김치 없으면 밥 못 먹는 신랑을 필두로 4살, 6살, 7살 아이들까지 김치 애정자들이니 담아야만 했다. 물론 부창부수라고 나 역시 너무도 김치를 사랑한다. 사 먹는 김치는 재료의 질을 믿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 값도 당해내기가 힘들다. 냉장고가 너무 작아 작년까지는 김장 엄두를 못 냈었다. 담아도 저장할 공간이 부족했던 탓이다. 자고로 김장이라 하면 배추 10포기 이상은 담아내야 하는 것이니. (라고 나는 생각한다. 평소에도 3포기, 5포기 김치는 줄곧 담았었으니.)
그런데 올해 초 김치 냉장고를 장만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컨테이너 이사하시는 분께 염치 불고하고 부탁하여 새 제품을 받았다. 스탠드형 은빛 김치 냉장고가 변압기를 꽂은 채 우리 집 지하에서 잘도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올해는 배추 한 박스, 10포기를 사다가 김장을 했다. 통에 담으니 김치 냉장고 길쭉이 김치통으로 3통이 나온다. 생각보다 적은 양에 실망했다. 내년 김장철까지는 남아줘야 김장이라 할만하건만. 게다가 열흘만에 김치 한 통이 바닥을 보였다. 손님도 치르고, 나눠주기도 해서인가? 아니다. 새로 갓 담은 김치는 얼마나 맛이 있던가. 온 가족이 아주 쉴 새 없이 김치에 젓가락질을 했다. 찢어먹고, 고기 삶아 싸 먹고, 국에 말아 얹어먹고.
결혼한 지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간다. 한국에 살던 때의 나는 김치를 혼자 담아본 적이 없다. 친정 엄마가 김장김치며 동치미에 깍두기, 총각김치를 담아주셨다. 여름 되면 좋아하는 열무김치도 담아주시고, 김장철 조금 지나면 나박김치도 맛나게 담아주셨다. 그뿐인가? 다섯 형님 중 세 형님이 모여 김장을 하는 시댁은 다량의 김장을 하셨다. 김장철마다 항상 내 배는 불러 있었거나, 갓난쟁이 아이들이 붙어있었던 터라 제대로 김장을 거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항상 몇 통씩 내어주셨다. 친정 엄마 김치가 더 맛나겠지만 이번에는 맛있게 되었다는 말을 보태주시면서. 더 필요하면 언제든 갖다 먹으라는 말을 보태주시면서.
처음 시집을 가서 시댁 동치미 맛에 반했다. 큰 항아리에 담아 광에 넣어 흙디운으로 익히는 동치미의 맛은 기가 막혔다. 먹을 때마다 신발 신고 차가운 바람맞으며 바가지에 무 한 통, 국물 가득 담아 가져다주시는 어머님 때문이었을까. 어머님, 정말 맛있어요. 그릇째 국물을 마시면서 쫑알거리면 함박웃음을 짓던 어머님 때문이었을까. 친정에 가서도 우리 시댁 동치미는 엄마 동치미보다 더 맛있다고 푼수 짓을 해가며 자랑했었다. 미국 나와 산지 3년째. 더 이상 얻어먹는 김치는 없다. 자식을 위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김치의 맛들은 내 혀 끝에, 머리 끝에 맴돌 뿐이다. 그리고 가끔은 가슴 곁에서 맴돌아 코끝을 찡하게, 목구멍을 컥 막히게 한다.
난 왜 이렇게 김치를 잘 담는 거야? 너무 잘 먹으니까 금방 없어지겠잖아, 그렇지? 더 담을까? 어련하시겠어요. 약간의 거드름을 더한 나의 말에 신랑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래서 두 번째 김장을 감행했다. 이번에도 배추 한 박스, 10포기이다. 엄마가 올해는 먹을 사람이 없어 김장을 스무 포기만 하셨다는데. 먹을 사람 많은 나도 스무 포기의 김장을 한다.
두 번째 김장은 '수미네 반찬'에서 본 레시피로 담아 보았다. 그런데 겨울철만 되면 TV에서 어김없이 보여주는 김장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하다. 열심히 양념을 만들고 다 절여진 배추에 속을 채워 넣기만 하는 것이다. 어릴 때에는 그것이 김장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진짜 김장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다. 김장의 맛을 좌우하는 것도 그것이 아니다. 김장의 진가는 배추 절이기에서 찾을 수 있다. 김장을 하고 나면 몸살이 찾아오는 이유는 속 만들기와 속 넣기가 아니라 절이기라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배추를 쪼개고 소금물에 담가 건져내어 그 위에 적당한 양의 소금을 뿌리기. 다시 소금물을 끼얹기. 한 밤중에 또는 새벽녘에 나와 한없이 무거워진 배추 뒤집기. 적당히 절여진 배추를 씻어내기. 물기 빼기. 이 과정이 있어야만 비로소 양념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양념 만들기도 그렇다. 깨끗이 닦아지고 정리되어 있는 무, 파, 갓, 마늘 등을 썰고 섞어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연신 두 손에 차가운 물 묻혀가며 씻어내고 다듬어내고, 갈거나 찧어야만 TV에서 보는 양념 만들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 주방이 한국 주방 같지 않아서 배추를 절일 때 좀 애를 먹는다. 게다가 난 잠이 많은 사람이라 새벽에 일어나 배추 뒤집기를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 방법, 저 방법을 시도해보다 정착한 방법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김장백이다. 일단 큰 대야에 찐한 소금물을 만들어둔다. 그리고 더 큰 대야에 김장백을 씌운다. 배추를 4등분으로 잘라 만들어 둔 소금물에 충분히 담갔다가 꺼낸다. 그리고는 김장백 안에 옮겨 켜켜이 배추 속마다 소금을 뿌려준다. 줄기 쪽은 많이, 잎사귀 쪽은 적게, 감으로 뿌린다. 그렇게 김장백 한 층이 배추로 가득 차면 만들어 둔 소금물을 약간 넣어준다. 그런 식으로 2층, 3층 쌓아가며 김장백 안에 소금 뿌린 배추를 채운다. 배추가 다 채워지면 남은 소금물을 몽땅 김장백 안에 부어준다. 배추가 2/3 이상은 잠길 정도로 부어주어야 하므로 소금물이 모자라면 다시 만들어 넣어준다. 이때 주의할 것은 김장백이 들어있는 대야가 넘치지 않을 양으로 소금물을 넣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있는 힘껏 김장백을 꽈악 묶어준다. 보통 저녁 8~9시쯤 김장백을 묶고 나면 자러 들어가기 전에 김장백을 뒤집어 놓는다. 다음 날 아침 7~8시, 또는 9시에 김장백을 열어 배추를 헹궈낸다. 그럼 적당히 배추가 절여져 있다. 물론, 나도 초보인지라 가끔은 내 맘대로 적당히가 안될 때가 있다. 누구나 다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두 번째 김장은 복병을 만났다. 마트에 김장백이 다 떨어져서 구입을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 중요한 절이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슬펐다. 절이기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래야 김치가 맛있어지는데, 그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의지가 생겨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나. 새로운 레시피로 만들어 본다고 육수도 이미 다 내놨고, 배추도 저렇게 쌓여있으니 해야지. 절인 배추를 채반에 얹어 물기를 빼는 동안 부지런히 양념을 만든다. 김치를 담아놓으면 우리 집 아이들은 김치 안에 들어간 무채를 그리도 잘 빼먹는다. 무채 먹는 사람이 없어서 지저분해 보인다고 무를 전부 갈아서만 넣는 집도 있다던데, 우리 집은 반대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도 한 박스를 사 왔다. 김장 김치에도 넣고 깍두기도 담고 동치미도 담으려고. 무채를 채칼로 썰면 물이 많이 나와 맛이 없다는 말을 듣고 언젠가 한 번 무를 죄다 칼로 썰어 넣었었다. 그랬더니 과연 그 맛이 다르긴 다르더라. 그 날 이후로 김치에 들어가는 무채는 칼로 썬다. 딸이 안쓰러운 친정 엄마는 뭐 그렇게까지 하냐고 볼멘소리를 하셨다. 그래도 맛이 다른 걸 어쩌냐며 채칼을 쓰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내 딸이 언제 이리 컸나 싶은 감회가 밀려오시나 보다. 다른 집보다 도톰하고, 많이 무채를 썬다. 그리고는 배추를 절였던 소금물에 잠시 담갔다가 꺼낸다. 아이들은 살짝 절여진 무채를 더 좋아한다. 오도독 씹히는 식감 때문일 게다. 그렇게 해서 고춧가루, 마늘, 생강, 파, 갓(없으면 말고. 첫 번째 김장은 올해 텃밭에 농사지은 갓을 조금 수확해서 넣었는데, 두 번째 김장은 없어서 넣지 않았다.), 찹쌀풀, 새우젓, 액젓, 육수, 설탕, 소금 등을 넣고 양념을 만든다. 아, 가끔 고구마를 찌거나 구워서 으깨 넣기도 한다. 그러면 양념이 찐득해지며 달달한 맛이 더해져서 좋다. 올해는 미처 고구마 생각을 못해서 넣지 못했다. 양념을 만든 후에는 배추에 남아 있는 물기를 쭉 빼낸다. 배춧잎 사이사이 정성껏 양념을 바르고 채워 넣는다. 그러면 내가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세 아이들이 참새떼처럼 몰려나와한 입 먹어보겠다고 줄을 선다. 짜고 매울 텐데 그러면서도 맛있다고 자꾸만 온다. 나도 그랬었지. 엄마가 김치를 담으면 고 앞에 앉아 입을 벌렸었지. 그러면 엄마는 제일 연하고 작은 배춧잎에 양념을 묻히고 쭉 찢었다. 그 안에 무채를 하나 넣어 말아 입에 넣어주곤 했었다. 그 맛을 내 아이들도 알게 되다니. 김치를 담다가 괜스레 행복해진다.
저녁에 고기와 함께 싸 먹을 양념 묻히지 않은 배추 2 덩이를 남겨 놓는다. 배추가 덜 절여진 탓에 두 번째 김장은 4통이 나왔다. 간단하게 어묵국에 겉절이를 얹어 점심을 먹는다. 김치 하나랑 먹어도 온 식구가 맛나게도 먹는다. 점심을 먹자마자 깍두기와 동치미를 담아낸다. 배추김치를 담고 나니 깍두기와 동치미는 일도 아니다. 부부가 앉아 대야 한 가득 깍둑 무를 썰고 양념을 만들어 묻혀낸다. 동치미는 더 간단한다. 소금물 간만 잘 맞추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이다. 소금이랑 뉴슈가를 넣어 국물을 만들고 잘 닦아낸 무를 통째로 넣는다. 배, 쪽파, 마늘, 생강, 고추나 절인 고추 등을 넣으면 끝이 난다.
김치 냉장고의 제일 위칸은 냉동고로 쓰고 있는 관계로 동치미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시댁 동치미 생각을 하며, 담아 놓은 동치미를 차고에 보관하기로 한다. 항아리 대신 스테인리스 김치통이지만, 흙바닥 대신 콘크리트 바닥이지만 짐짓 기대를 해본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들여다볼 때마다 주문을 더한다.
아, 김장의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갈무리이다. 누구도 대신 치워주지 않으니까. 있는 대로 다 나와있는 대야며, 소쿠리며 채반을 깨끗이 씻어내 햇빛 드는 데크에 내어 말린다. 남은 양념도 봉지에 넣어 라벨링 해서 냉동실에 보관해둔다. 마지막으로 고춧가루, 소금, 여러 가지 양념들로 뒤범벅인 부엌을 구석구석 닦아낸다. 윽, 소리가 절로 나는 하루다. 벌써부터 종아리도 당기고 허리도 아파온다. 김장을 하고 나니 하루가 다 갔다. 곧 저녁해 먹을 시간이구나. 아, 잠시만. 잠시만 편히 엉덩이 좀 붙였다가 일어나자. 당 떨어졌다며 초콜릿을 까 나 하나, 신랑 하나.
그래도 김장 뒤에 오는 이 뿌듯함을 무엇과 바꾸리오. 우리 가족 먹을 양식도 충분하고, 나눠 먹을 양으로도 부족함이 없으니 정말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 맛에 김장을 하는가 보다. 내년에는 3박스를 할까 보다.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러다 밀려오는 허리 통증에 고개를 절레절레. 뜨끈한 전기장판이 참으로 그리워지는 저녁나절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