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비행기를 10시간 이상. 한 번에 오는 비행기도 없어 두 번째 비행기를 타고 다시 1~4시간. 그러고는 차를 타고 2시간을 더 달려야 만날 수 있는 이 곳. 이 곳에서 살기를 14개월(이 곳은 미국 Missouri주에 있는 Rolla라는 작은 도시입니다.) 1년 남짓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은 생각을,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 귀머거리, 반 벙어리로 살아가려니 그 답답함과 자괴감은 가히 상상 이상으로 나를 주눅 들게 하였다. 나 혼자나 신랑과 단둘이 살아가는 거라면 덜할 텐데. 아이를 세이나 보듬어야 하다 보니 타인에게 마음과 생각을 정확히 전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 곳에 정착한 지 두 달쯤 되었을까.
큰 아이, 둘째 아이가 다니는 데이케어에서 아이들이 읽을 책을 주문하였다. 그 날은 작은 아이 사물함에 책이 꽂혀있었다. 주문한 책인가 싶어 살펴본 책의 표지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선생님한테 물어보자니 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아이 셋은 옆에 서서 참으로 심난하게 하는지라 그저 책을 들고 급히 교실을 빠져나왔다. 책을 들고 한참을 서서 책 한 번, 선생님 한 번 바라보던 나를 이상하게 응시하던 선생님의 눈동자가 뒤통수에 박힌 것만 같았다.
집에 와서 비닐을 벗겨내고 책을 펼쳐 찬찬히 살펴보니, 그 안에 다른 아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내 나라에서라면 쾌활한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확인했을 텐데. 주저하다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확인하지 못하고 온 내가 한심스러워 목이 메도록 울었다. 내 아이들 제대로 뒷바라지도 못해주고 맘고생, 몸고생만 시킬 것 같은 불안감에 꺼이꺼이 울었다. 여전히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그만 몸서리쳐져 흐느껴 울었다.
어린 시절부터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육아 환경에서 자란 나는 성장기에도,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가 되어서도 완벽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끌려다니고 있었다. 모국어가 아니니 모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완벽하지 않은 내 영어 실력 때문에 입 벌리기조차 망설였던 것이다. 내 영어 실력은 평실을 가도 절대 완벽해지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내내 완벽하지 못해 우울해하고, 완벽하지 못해 화를 내고, 완벽하지 못해 짜증을 내고, 완벽함을 내려놓지 못하는 나의 완벽하지 않음을 탓하곤 했다. 그리고 심지어 완벽하지 않은 나를 보듬어 줄 완벽한 너를 찾았다며 너에게 완벽함의 짐을 얹어주었다. 내 안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완벽함이라는 무거운 돌덩이가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무의식의 너머로 얼굴만 내민 채 헐떡이다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바다에서 신비로운 노래를 불러 넋을 빼앗아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끈다는 신화 속의 '세이렌(Siren)'이 내 무의식에도 사는 것만 같았다. 내 안의 그녀가 완벽함이라는 무의식의 바다로 나를 잡아끌어 결국 이대로 가라앉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도 괴로웠고 무서웠다.
그 날 아이들이 있는데도 널브러져 울던 나를 끌어안고 너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위로받고 있음에 서러워진 내가 알아듣지도 못할 웅얼거림으로 한참을 너에게 매달렸다. 너는 좀 진정된 나를 떼어내고는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구든지 그럴 수 있어. 모르는 상황이니까 겁이 난 거야. 괜찮아. 이제는 어떤 상황인지 알았으니까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너는 완벽하지 않은 날 나무라지 않고, 내가 왜 완벽할 수 없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조차 납득할 수 없는 나의 감정들을 나에게 설명해주고, 이것이 너에게 끝이 아니라고, 다음 기회가 또 있다고 말해주었다. 신기하게도 복작거리던 머리와 마음속이 말끔해졌다. 내가 무의식의 세이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너는 나의 귀를 틀어막는 밀랍이 되어주었고, 나를 더욱 단단하게 너에게로 묶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의 완벽함에 대한 집착 또한 내려놓아야 한다고, 인지하고 있던 것이 마침내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나 또한 네 안에서 꿈틀대고 있을지 모를 어떤 세이렌으로부터 네가 벗어날 수 있도록 너의 밀랍이 되어주리라. 쉽지는 않을 게다. 내가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그러나 그렇기에 난 또 의지를 갖고 살아가고 그러할 것이다.
"괜찮아 여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너무 완벽할 필요 없잖아. 자신엔 대한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아요."
내일 있을 첫 수업 준비로 한숨을 푹푹 내쉬는 너에게 말을 건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