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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Jan 05. 2019

사라진 결혼기념일

2015. 04. 04 결혼 6주년.

봄은 언제나 옳다며 스토리에서 나눈 봄꽃만큼 예쁜 추억들을 만나보란다. 카카오스토리에 결혼 6주년 가족사진이 뜬다.


남자와 여자는 매 해 결혼기념일에 가족사진을 찍기로 약속했다. 첫째, 둘째 해는 남자와 여자 둘 뿐이던 사진이 다음 해에는 배불뚝이 여자와 남자로 채워졌다. 그다음 해에는 쪼꼬미가 하나 더 해졌고, 또 다음 해에는 두 번째 쪼꼬미가 합세하여 넷, 또 한 해 더 지나 마지막 쪼꼬미가 등장하며 다섯이 되었다. 6주년 결혼사진은 미국에 나오기 전 한국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가만 생각해본다.


'2015년에 이 사진을 찍었고, 2016년에는 갑작스러운 신랑의 수술로 찍을 수 없었고. 그다음 해는 2017년. 어라? 지금이잖아. 올해잖아! 그러니까 우리 결혼기념일이 3월 29일. 오늘이 4월...... 오! 마이! 갓! 지나 가버렸잖아? 세상에! 결혼기념일을 잊다니!'


그도 나도 둘 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보, 세상에. 우리 올해 결혼기념일 둘 다 까맣게 잊고 지나간 거 알아?"

"어? 아, 그.. 러네?"

"아! 억울해, 억울해, 억울하다고!"


넌 왜 잊었냐며, 넌 잊으면 안 되지. 이런 마음이 불쑥 들어와 나도 모르게 억울해라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억울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는데 그는 영 반응 없이 조용하다. 그 옆에 누워 나도 조용해졌다. 그 짧은 순간 입에서는 '억울해'가 흘렀는데 마음은 백지이다. 아마 올 결혼기념일에는 달달한 멘트도 없고, 특별한 선물도, 꽃도 없었다는 생각이 나의 입에 '억울해'를 달아주었을게다. 갑자기 그런 나의 의식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신기하게도 아무렇지 않아 졌다. 해골 물을 마시고 다음 날 진리를 깨우쳤다는 원효대사도 아니건만 그냥 다 지나가버렸다. 평범한 인간에게도 때때로 깨달음의 순간이 오는가 보다.


'왜 나만 억울해? 그도 억울할 수 있잖아. 그가 아니라 내가 잊은 거잖아. 사실, 그 순간에는 기념일이라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걸 거야. 그것보다 저 중요한 순간들이 있었겠지.'


그런데 그날. 나와 그는 어떤 시간을 나누었을까? 우리에게 어떤 하루였을까? 혹시 엄청 싸웠을까? 아이들 때문에 심하게 지쳐 있었을까? 아니면 기분이 좋아 콧노래로 하루를 시작했을까?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다시 억울해졌다. 시간이 꽤 흘러 8주년 결혼기념일을 추억할만한 순간이 사라져 버린 사실이 아쉽고 억울했다. 역시. 현자가 갖는 깨달음과 평범한 인간이 갖는 깨달음은 다른 것인가 보다.


"나 정말 억울해!"


그는 여전히 무반응이다. 그리고 곧 나에게도 고요함이 찾아온다.

그냥 그날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을 그런 날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날은 생사가 달린 급박한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게고, 아이들이 아파서 힘들어하지도 않았을게다. 그냥 흐르는 날들 중 하루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큰 일 없이 지나간 그 날이 감사했다. 그날, 의미를 부여한 하루를 보냈다면 우리는 조금 더 행복했을까? 조금 더 너그러웠을까? 그래서 후에 그 날을 추억할 거리들이 더 많이 생겼을까?


"올해 기념일 즈음에는 우리가 이사도 했고, 이사한 다음에 바로 다른 가족들이랑 여행도 다녀왔잖아. 아마 정신이 없어서 둘 다 잊었던걸 거야."


홀로 조용히 생각이 바쁜데 말이 없던 그가 툭 던졌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랬다. 정신없이 이사를 했고, 정신없이 여행을 다녀왔고, 아이들이 봄방학이라 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기념일 빠진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날을 추억하기 위한 '사라진 결혼기념일'이라는 이야깃거리를 갖게 되었다. 또 찰나의 깨우침을 얻기도 하였다. 자연적으로 흐르는 것들의 일부가 되는 것이 지극히 평화롭고 감사한 일이라는. 조금 살다 보니 '날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별일 아니구나'하는 이런 순간도 찾아온다. 우리는 날마다 다른 순간들로 우리의 페이지를 채워나가고 있다. 그 순간들은 생기 넘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며, 싱그럽기도 하고, 때로는 먹구름 드리우기도 한다. 그 순간들 사이로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때에 '우리가 결혼 한지 벌써 8년째가 되었구나. 계속 많이 사랑하자.' 하며 마주 보고 웃을 수 있으면 그만이다. 알고 있다. 다음 해가 되면 난 또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려 할 테고, 꽃을 사고, 그와 와인을 한 잔 하고, 특별한 한 끼를 함께 하려 할 게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끔은 사라져 버리는 기념일을 그냥 두어도 된다는 것이다. 항상, 꼭, 그 날일 필요는 없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의 결혼생활이 그렇게 뜨뜻미지근해져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에, 육아에, 사람에 치여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잘 되어가는 것인지, 잘못되어가는 것인지 그 흐름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어렵다. 꼭 따져야 하는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저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하게 되는 부부의 한 챕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챕터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60년을 같이 살아도 깍지 끼고 걷는 부부가 되고 싶다. 어느 날은 미지근 한 날도 있고 그러다 어느 날은 차갑기도 하고, 뜨거운 날도 있고 그런 거겠지. 그런데 요즘은 너무 오래 미지근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오늘은 기필코 뜨겁게 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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