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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Jan 05. 2019

오늘은 나한테 그러지 마.

어둠이 너무도 길었다.

이제는 아이들이 빨리 잠들지 않는 밤이 그다지 힘들지 않다. 대부분은 나도 함께 잠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날은 내 온몸의 감각들이 잠들고 싶지 않다고 아우성이었다. 빨리 잠들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꽤 지친 상태로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너는 역시나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고, 평소와 다르게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오늘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싶어 들여다본 너의 모니터 안으로 낯설지만 알아차릴 수 있는 화면들이 돌아다닌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게임을 시청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네가 게임을 졸업한지는 꽤나 오래전이지 않았었나 싶었다. 그래서 정말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다.


"왠 그런 걸 다 보고 있어?"


네가 정말 뜬금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 때 금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나는 그만 그 순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나는 나의 힘든 감정에만 집중하고 말았다. 맞은편에 앉아 입을 삐죽삐죽, 허리를 베베, 눈을 그렁그렁 만들어댔다. 나를 보아달라고 너에게 온갖 신호를 보냈다. 나와 다르게 너는 나의 기운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헤드폰을 빼고 내 곁으로 와 생긋거리며 묻는다. 


"왜, 왜 그러실까?"

"왜겠어. 몰라? 기분이 안 좋아. 애들이 잠드는 데 너무 힘들었어."


나는 사근 거리는 너에게 평소처럼 툴툴거렸다. 툴툴거리는 나의 말을 받아내는 너의 눈빛은 여전히 나긋했고 부드러웠다. 그런데 그런 평온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마디가 돌아왔다.


"오늘은, 오늘은. 나한테 그러지 마라."


상황이 역전되었다. 네가 나의 목 밑으로 얼굴을 파고들었다. 


'뭔가, 일어났구나. 뭘까, 뭘까, 꽤 심각한 건 아닌 것 같고.'


그제야 너를 향한 나의 감각들이 곤두서기 시작한다. 너의 호흡을 들으며 짧은 시간 머리를 굴리는데 네게서 또 한 마디가 돌아왔다.


"오늘 나, "

"오늘 너무 힘든 일 있었어?"


너의 말을 미처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함이 마중을 나가고 말았다. 그만큼 나는 불안했다.


"오늘 나. 좀 슬퍼."


머뭇거리던 네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선택했다. 불안감이 배가 된다. 너에게서 슬프다는 표현을 들어본 지가 얼마만일까.


"슬퍼? 왜? 무슨 일 있었어?"


불안함이 극에 달한 나의 말투가 제법 공격적이었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침착하게 너의 슬픔의 이유를 설명한다.


"제안서 쓴 거. 미끄러졌어."

"아...... 그거...... 속상하겠네, 우리 신랑. 이리 와, 여보."


나보다 더 큰 몸집의 너를 끌어안고는 머리를 쓰담쓰담 해준다. 너는 한참 동안 내 심장 곁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너의 속상함, 실망감, 자존감 뭐 이런 것들의 울렁거림이 전해진다.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라는 나의 안도감도 너에게 닿았을까? 그 잠깐 동안의 정적이 너와 나를 하나로 묶어준다. 그러고 나서 나는 너에게 위로를 전했던 것 같다. 그냥 넘어지는 순간이고, 다시 일어서면 된다고 했던 것 같다. 누구나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다고도 했던 것 같다. 너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이것이 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도 말했던 것도 같다. 아마도 나는 그런 말을 전하면서 여전히 불안했던 것 같다. 너에게 힘든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불안하고, 네가 좌절하는 것이 불안하고, 네가 슬픈 것이 불안하고. 너는 그런 나에게 다 털어낸 듯, 별일 아니라는 듯 싱긋해 보였다. 나의 불안을 알아챈 너의 본능이었을까?


돌아서서 생각해보니 참 다행이다. 그래, 너는 가끔은 나에게 그렇게 단호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다. 너의 감정을 숨기지 말고, 참지 말고, 다 티 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너의 그런 말들을 불안해하지 않고 받아낼 수 있어야만 한다. 다음에는 조금 더 산뜻한 마음으로 너의 가라앉은 감정들을 만나겠다고 다짐해본다. 다음번에는 나의 불안의 무게를 더욱 가벼이 하여 너의 불안의 무게를 더 많이 안겠노라 다짐해본다. 그렇게 조금씩 서로의 무게를 나누어 짊어지는 생을 살아가겠다고 되뇌어본다. 


사랑하니까.


그 밤, 불안의 무게를 조금씩 나누어 가진 너와 나는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김치 부침개를 부쳐 세상 맛나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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