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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Jan 08. 2019

무례한 사람

<여자>


분명 싫다고 딱 잘라 말했는데 왜 또 묻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왜 처음 묻는 것처럼 또 제자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시 물어올 때마다 네가 그런 마음 언저리에서 떠나지를 못하는 거겠지 싶어, 내가 좀 양보하면 되는 건데 싶어, 거절을 뒤집곤 했었다. 오늘도 그랬었다.


눈이 참 새하얗고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아이들 학교는 클로즈되었고, 아침나절 눈놀이를 하고 들어와 뜨끈한 수제비를 맛나게도 건져먹었다. 아이들 독감 예방접종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너는 눈이 와서 길이 안 좋으니 집에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애초에 갈 수 있는 시간을 낼 수는 있었던 걸까? 아이들은 눈이 쌓였으니 썰매를 타야 한다고 흥분해서 소리쳤다. 아무래도 아빠와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없는데, 왜 다른 이를 위해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것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래서. 다시 거절했다.


도대체 내가 처음 딱 잘라 거절했던 그 마음은 어디에서 위로받아야 하는 건지, 거절하면서 덧붙였던 이유를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내 마음을 헤아려 보기는 한 건지. 그만 순식간에 마음이 뭉그러지고 으깨져버렸다. 어떻게 주워 담아야 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또 물어오는 말, 그 앞머리에 한 마디만 덧붙여 줬더라면 이토록 한 줌 가루가 되지는 않았을게다. '네가 싫다고 말하긴 했지만'이라든지 '미안하지만'과 같은 말. 네가 한 말의 마음과 의미를 잘 안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부탁한다는 그런 말.


난 오늘. 무례한 사람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


일의 연장선인 저녁식사를 마치고 부랴부랴 집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잠들기 전 책 읽기 시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등이고 팔, 다리에 매달리는데 너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안다. 화가 났다고 말 대신 온몸으로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오늘은 눈이 와서 눈사람도 만들고, 엄마랑 썰매도 탔다고. 그리 추위를 타는 네가 아이들과 함께 눈 쌓인 마당에 나갔다니. 생전 졸라도 구적거린다며 집 안을 고수하던 네가 아이들 썰매를 태워줬다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흥분한 아이들을 겨우 가라앉혀 자리에 눕히고 보니 작은 아이 방 커튼이 떨어져 있다. 벽에 고정해놓은 커튼 봉까지 덜렁거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가 어땠을지 그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증거물이었다. 생전 안 하던 눈놀이를 하고, 커튼이 떨어지도록 애들은 야단법석이었고. 넌 오늘 많이 부대꼈겠구나. 재빨리 커튼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불은 꺼져 깜깜해져 있고 아직 잠들지 않은 막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전에 아빠랑 허그를 하겠다고 기다렸단다. 막내가 꼬옥 허그를 하며 재잘거린다. 오늘 눈이 많이 와서 해피했고, 엄마가 썰매를 태워줘서 해피했단다. 엄마가 썰매를 엄청 빠르게 끌어서 너무 재미있었단다. 그러는 동안에도 너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잠이 든 줄 알았다.


거실로 나와 미처 다하지 못한 일들을 정리했다. 오늘은 정말 바쁜 날이었다. 엉덩이 한 번 붙일새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쟁터 같은 하루였다. 한두 시간 일을 더 마무리하고 방으로 들어오니 네가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불속으로 들어가 네 옆에 몸을 꼭 붙이고 누웠다. 그런 나를 밀어내지는 않으니 아직 기회는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네가 태블릿을 정리하더니 스탠드 불을 꺼버리고는 눕는다. 왜 불을 끄냐고 말하는 나에게 자려고 들어온 거 아니냐며 네가 퉁명스럽게 되묻는다. 아니라고 대답하며 어둠 속에서 너를 꼭 껴안는다. 너는 뒤에서 안아주는 걸 좋아한다. 어제는 사랑한다고 말하더니, 역시 같이 자야 맘이 놓인다고 그러더니. 오늘은 이리 찬바람이 쌩 부냐고 투덜거려 보았다. 너는 어젯밤이 떠올랐는지 참지 못하고 '푸웃'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네가 민망했던지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 큰 소리를 내며 이불을 걷어찬다. 이제 되었다. 왜 이리 심술이 났는지 네가 말할 것이다. 난 잘 듣고 있으면 된다. 그러면 다시 다정다감하고 순한 나의 아내가 되돌아올 것이다.



<다시 여자>


"내가 왜 화났는지도 모르지?"


나는 약간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화의 문을 열었다. 너는 네가 짐작하는 것 중 어느 것일까 재보는듯했다. 왜 싫다고 딱 잘라 말했는데도 또 묻는 거냐고, 왜 처음인 것처럼, 내 대답은 전혀 들은 적 없는 것처럼 또 물어보는 거냐고. 그런 경우가 요 근래 엄청 많은 것 아냐고. 따졌다. 너는 미안하다 했다. 그래서 뭐가 미안하냐고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네가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오늘 그 말을 다시 물을 때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단다. 그런데 상황이 이러저러해서 어쩔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으면서도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단다. 내가 틀렸다. 네가 내 말을 마음에 담고 있었구나. 그런 마음이었으면서도 또 툴툴거렸다. 상황이 그랬으면 다시 물을 때 앞에 한 마디 더해줬으면 얼마나 좋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해줘도 좋고, '미안하지만'이란 말만 보태도 좋았을 거라고. 나는 원래 그런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이지 않냐고, 네가 핑계를 대었다. 원래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하고 말아 버리니 달라지지를 않는다고, 아주 버릇이 이상하게 들었다고 쏘아붙였다. 다음부터는 앞에다가 구구절절 덧붙이라고 말하고는 돌아누웠다. 

등짝이 따땃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운 것만 들어찬 내 말들이 너의 체온으로 녹아내린다. 너의 그 따스함으로 나는 다시 온순하고 부드러운 나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시작한 말을 마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왜 나 같은 여자랑 결혼을 했느냐고, 다른 여자랑 결혼했으면 네가 참 편히 살지 않았겠냐고.' 나를 작고 작게 눌러 빼져 나온 그 생각들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늑하고 포근한 기운을 이기지 못해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끝끝내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너의 상황을 헤아려보지도 않았으면서 너는 나를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너는 무례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버린 것을 사과하지 못했다.


난 오늘. 너에게 무례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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