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당신.
쓰고 싶은 순간은 불현듯 찾아옵니다.
머리를 감다가, 자려고 누웠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보리된장을 만들다가, 비 오는 소리를 듣다가......
며칠 동안 흥이 올라 글을 썼습니다. 안방 창문 앞에 교자상을 펼쳐놓고, 더 이상 쓰지 않는 아이들 낮잠 이불을 두 번 접어 방석을 대신하여. 왜 하필 그 좁은 구석에 앉아 궁상 시리게 글을 쓰냐 묻는 당신에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해가 제일 잘 드는 곳이니까."
그러다 보니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팠습니다. 아무래도 책상이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많은 테이블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안방에 들여놓기 위해 책상을 또 사는 것이 심각하게 고민되었습니다. 그런 나에게 당신이 흔쾌히 말했습니다.
"사자. 이왕이면 좋은 걸로."
그런데 다음 날 저녁에는 불쑥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책상을 사면 돈만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요. 하루가 지나 점심을 먹으며 당신에게 책상은 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제법 강단 있게 말했는지, 당신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3시간쯤 지났을까요?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다가 불쑥.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번처럼 떠오른 생각을 놓쳐버릴까 봐 다다다 급하게 교자상 앞에 앉아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몸에 걸친 거라고는 면팬티 한 장에 브래지어가 전부였지요. 애들이 올 시간이 다 되어가기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부랴부랴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대충 적어 놓고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습니다. 그제야 깔고 앉아 있던 이불이 축축한 것을 알아차렸어요. 평소 같으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오더군요. 이게 뭐라고 속옷 차림으로 앉아서 이러고 있었던 건지.
열정. 나에게 그런 열렬함이 남아있다니. 강렬히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니. 그런 내가 새로우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도파민이 솟구쳐 올라 세상 모두에게 친절할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인생사 불현듯 찾아오는 수많은 때를 매번 저렇게 속옷 차림으로 맞이한다면 어떨까요? 호르몬 과다분비로 부작용을 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살면서 당신이나 나에게 속옷 차림으로 맞이할 수 있는 순간이 몇 개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끔은 누구에게나 그런 짜릿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보, 당신.
주말에는 새 책상을 사러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