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생각의 거짓말에 속고 있다
누구나 살아있기 때문에 생각을 한다. 하지만 좋은 생각만 하게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면 나도 똑같이 복수하고 싶고, 우울할 땐 내가 행복할 자격이 없는 존재 같다. 실수를 하면 '나는 늘 이런 식이지…' 하며 자책한다. 뇌사상태가 되지 않는 한 생각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부정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생각의 이런 점을 떠올리면 때때로 인생이 성가시게 느껴진다.
생각의 무서운 점은 믿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자꾸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이 곧 나 자체라고 믿어버린다. 늘 우울하다는 생각에 빠져 살면 우울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마음속에 분노가 있는 사람은 세상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는 견고한 공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것은 정말 믿을 만한 생각인가? 내 생각은 '진짜 나'(참나)일까?
아침 명상 중에 있었던 일이다. 평소처럼 집중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콩이(반려견)의 한숨 소리가 계속 들렸다. '오늘따라 좀이 쑤시나 보다' 했다. 명상이 끝나고 한참 기다렸을 콩이를 달래주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방을 나와 집안 곳곳을 살폈다. 거실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명상 중에는 항상 방 문을 굳게 닫아두기 때문에 중간에 거실로 나갔을 리는 없었다. 코난에 완벽 빙의해 치밀하게 추적했다. 수사 결과는 성공적. 범인은 명상 중에 듣는 ASMR이었다. 항상 숲 소리 ASMR을 듣는데 그 안에 비슷한 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소한 소리 하나 때문에 개가 있다고 완벽하게 믿다니. 사기라도 당한 느낌이었다.
이 일로 생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부정적인 생각은 버리고 옳고 좋은 생각을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애초에 생각 자체가 허상이라면 무엇이 좋고 나쁘다고 구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고 믿는 것은 내가 진리로 삼은 것일 뿐이다. 진짜 진리라면 시간과 공간, 대상을 초월하여 반드시 ‘참’이어야 하지만 대개 우리가 가진 생각과 믿음 중에 그런 것은 없다.
유튜브에서 법상스님의 법문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스님께서는 생각은 허상일 뿐이니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하셨다. 생각에는 반드시 판단이 섞여 있다. '이것은 가방이다', '저 사람은 키가 크다' 같은 사소한 생각조차 그렇다. 가방을 가방이라고 구별하고, 누군가를 키가 크다고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무언가를 구분하고 평가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익힌다. 이처럼 판단은 학습한 것들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판단, 즉 생각에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다. 생각이 허상에 불과한 이유가 이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 꽃을 보고 '향기로운 꽃이다'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누군가는 '장미가 시들었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생각은 없다. 예를 들어 '향기로운 꽃이다'라는 생각을 뜯어보면 총 두 번의 판단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꽃이 향기롭다고 판단하는 것, 그리고 꽃을 '꽃'이라고 구분하는 것이다. 꽃의 본질을 보려면 꽃에 꽃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도 안 되고, 그것이 향기롭다거나 시들었다고 해석하지도 않아야 한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그럼 참나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참나를 구분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법상스님 말씀을 빌리자면, '눈이 눈을 볼 수 없듯 나도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참나를 온전히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참나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상 혹은 '참나가 아닌 것'일뿐이다. (이 말이 어렵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생김새를 알기 위해 온갖 거울을 활용하는 걸 떠올려보면 된다) 내가 참나를 구분할 수 없다면 참나가 아닌 것도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이로써 나와 타인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불교에서 ‘내가 곧 부처고 부처가 곧 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수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핵심은 ‘생각은 허상’이며, 껍데기인 나와 진짜 나를 구분하는 것 역시 허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내 생각은 참나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온다. 생각은 참나가 아니다. 생각뿐만 아니라 감정도, 육체도 참나가 아니다. 참나는 텅 빈 ‘공(空)’의 상태이고, 그렇기에 참나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부모, 자녀, 직장인, 취준생 등 다양한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반대로 그 총합이 나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그 생각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좋은 부모/자식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회사에선 일 잘하고 싹싹해야 한다는, 늘 행복해야 하고 승승장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만히 지켜보자. 마음대로 될 리가 없는 만사를 통제하려고 스스로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게 된다. 우리는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청소년에게는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절대 할 수 없는 자아의 숙제를 해내기 위해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은 모른 척한다.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일뿐이다. 스스로에 대한 수많은 판단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본질을 들여다보자. 본질에는 심플이라는 글자도 무거울 만큼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