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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Oct 14. 2022

해상도를 낮춰줘

쓴 글은 보여줘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듣고 그 얄팍한 일념으로 브런치 주소를 여기저기에 공개했다. 물론 오래 가지는 못 했지만 어딘가에 뿌려진 도메인은 살아있을 테니... 주변인들이 글을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타닥타닥 태어나는 자음-모음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역시 말이든 도메인이든 주소든 뿌린 걸 주워 담는 것은 쉽지 않다.


허리가 아프다. 예전에 디스크 초기일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조심하던 것도 채 3개월이 못 갔다. 다리 꼬는 건 아직도 좋고 엎드려서 책을 읽거나 OTT를 보는 것도 여전히 맘에 든다. 내 허리도 내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원활한 합의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약을  H에게 얼른 개발해달라고 해야겠다.


어제는 동아리에 나갔다. 몇 주 전에 헤어진 전남자친구는 모임을 진행하고 나는 그레이존에 들어온 먼지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모임이 끝나고 담배를 피우러 갔다가 우연히 E와 만났다. 난 E의 꺼끌꺼끌한 다정함과 깊이 모를 속내 그리고 이런 게 묻어있는 그녀의 고양이 파우치까지 처음부터 맘에 쏙 들었다. 난 쉽게 사람을 좋아하지만 강요하는 것은 딱 질색이기 때문에 혼자 내뿜을 뿐이다. E와 많은 대화를 했다. E는 내 이야기를 들어줬고 나는 E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녀는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고, 글을 쓰고 싶었고, 그래서 지금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난 E의 얘기를 들으며 남산타워 불빛 냄새를 들이마셨다. 동아리방은 딱 하나, 남산 냄새가 나는 것 말고는 장점이 없다. 질량이 너무 큰 장점인 게 문제지만.


김광석. 김광석과 이적의 노래를 들었다. 그 남산 냄새나고 모기가 많은 5평 남짓 방에서 말이다. 꼬질꼬질한 20대들이 모여 매일 통성명을 하고 글을 읽고 네가 내 글에 대해 뭘 알아 씨팔-소리를 지르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갑자기 속내를 거울에 비춰보기도 한다. 아주 자주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공간엔 분명 무슨 염원이 담겼을 것이다. 60년 동안 이 5평은 사람 억울한 생각만 들도록 계속 진화해 온 것이 분명하다. 비가 오면 빗물이 새고 히터는 없어 이를 부딪혀야 살아낼 수 있고 쓸데없는 글감밖에 못 될 사랑을 만들어내고 이상한 정으로 덕지덕지 벽지를 바르게 한다. 두 줄만 남은 기타가 4대나 있는 그 5평에 모인 사람들. 2줄만 남은 것들을 버릴 용기 없는 인간들이었다. 단연코 나 또한.


L이 알려줬던 노래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너는 왜 항상 이렇게 낮은 노래만 들을까. 몇분음표인지 모를 것들이 맥북 스피커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데 실려온 것들에 긍정은 단 한 톨도 없다. 아득하고 멀고 그립고 채도 낮게 아픈 것들만 담아 이렇게 노래를 만드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런 것만 듣는 너도 참 일관적이다.


어느 날 H가 그랬다.

- 언니는 왜 그런 병신 같은 애들만 만나? / 알면 내가 잘도 피해 갔겠지. 안 그래?

- 그렇긴 하네. / 병신 같은 걸 좋아하는 취향인가?

- 개소리야.


불평등한 세상에서 병신 티 안 내고 살려면 11월 도움닫기는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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