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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Jan 04. 2024

[12/25] 테트라포드 러브

3일 차

조식! 바나나 프렌치 토스트

9시 조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8시부터 알람을 들었으나 못 일어나서… 8시 20분에 겨우 눈을 떴어요.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대충 정리하니 8시 57분, 조식을 먹으러 다이닝룸으로 갔습니다. 어제는 못 뵌 여자 사장님도 계셨어요. 조식은 정말 예쁘고.. 정성이 가득 담겨있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나 퀄리티 높은 무료 조식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신 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숙박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은데. 조식 시간엔 앞자리에 모르는 분이 앉았는데요, 굳이 대화하고 싶지 않았고 그분도 그러실 것 같아서 조용히 바나나 프렌치토스트를 한 입 먹고 차를 한 입 마시는 걸 반복했습니다. 밥을 먹으며 벽에 붙은 제주 지도를 바라봤어요.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지만 그냥 볼만했습니다. 조식을 다 먹고 일어날까 했는데 사장님이 [차 한 잔 더 드릴까요?] 하고 물어보셔서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차를 한 잔 더 마시며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오늘 계획이 없으신 건가요? 물으시길래 이제부터 세워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주 한 바퀴를 다 도는 거냐, 저 사람은 제주도에 10년 살았는데 우도에 가본 적이 없다, 인스타 어떤 계정을 팔로우하면 용머리해안 통제 정보를 알 수 있다 등 스몰토크를 했네요. 짧은 대화였지만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부부가 함께 나눠먹을 토스트를 만드는 그 작은 다이닝룸이 참 예뻤습니다. 나와서는 사장님이 자전거를 꺼내주셨어요. 이 정도 날씨면 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럴까? 생각했지만 장갑과 모자가 있으니 가능할 것도 같았습니다.


기모 바지와 장갑과 녹슨 자전거와 내 가방

오늘은 E언니랑 점심에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들어가서 준비를 하고 어제 입었던 니트를 다시 꺼내 입은 뒤 바라클라바와 장갑을 챙기고 길을 나섰습니다. 컨버스 하이 끈을 묶고 있는데 숙소 문 밖으로 보이는 작은 뜰과 녹색 자전거가 예뻐 보여서 사진을 몇 장 찍었네요. 장갑을 단단히 끼고 지도를 한 번 본 후 감으로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자전거 시동을 걸었습니다. 발을 굴러 출발.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안장이 좀 낮아 높이고 싶었으나 안장 높이 조절 장치에 슬어있는 녹을 보고 한 번, 장갑에 묻은 녹을 보고 또 한 번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송악도서관을 끼고 올레길 리본을 따라 해안도로로 갔습니다. 해안도로가 예뻤습니다. 날씨가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잿빛 구름 새 자로 잰 듯 바다로 쭉 뻗은 빛면이 좋았습니다. 그곳이 아직도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방금 찾아보니 난 모슬포방파제에 다녀온 모양이네요. 자전거를 세워두고 방파제를 걸으려고 했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자전거가 넘어질까 봐 무서웠습니다. 바위에 단단하게 기대놓아 보기도 하고 짐도 얹어보고 여러 가지로 노력했지만 불안함은 가시질 않았어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자전거 때문에 방파제를 걷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불안을 잠시 두고 방파제를 쭉 따라 걸었습니다. 파도가 많이 쳤습니다. 방파제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습니다.


옛날 문학회 합평에서 방파제 관련된 문학작품이 한 번 나왔던 것 같은데, 그게 떠올랐어요. p로 시작해서 Love로 끝나는 작품이었는데. (테트라포드 러브인가 보다) 누구 거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M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오늘은 성탄이라 참아야겠습니다. 멀리서 보면 방파제가 아주 별 거 아닌 것 같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아주 거대합니다. 그리고 한 번 빠지면 절대 올라올 수 없대요. 아주 깊고 촘촘하고 위험한 것입니다.

테트라포드


사실 방파제를 보고 짧게 이런 생각을 후루룩 하는 와중에도 내 마음에는 자전거 생각뿐이었어요. 바람이 불어 자전거가 넘어지면 어떡하지. 가방 안에 노트북도 있는데. 망가지면 어떡하지. 자전거가 바다에 빠지면 어떡하지. 자전거. 자전거. 자전거 생각에 내 시간은 산책이 아닌 자전거 생각하기로 가득 찼습니다. 두고 온 자전거를 걱정하는 나. 서울에 두고 온 것들을 생각하는 나. 지나온 것들을 걱정하느라 지금을 놓치는 나.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바쁘게 바쁘게 옮겼어요. 자전거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내 걱정하는 마음은 자전거까지 닿지도 못했을 거예요. 여기 잘 있겠다고 했잖아- 녹슨 바구니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자전거 옆에 앉아 노래를 들었습니다.

모슬포항 방파제

김사월의 너무 많은 연애. 어떤 친구가 사운드클라우드에서 이 노래 녹음한 것을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은 일입니다. 내가 원했던 건 사랑뿐이었는데. 갑자기 소리 내 노래를 부르고 싶어 져서 음성메모를 켰네요.


곧 천천히 일어나서 자전거에 다시 올라탔어요. 모자도 단단히 쓰고, 장갑도 단단히 끼고. 출발. 하와이안 코나를 마시러 갑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에 왔어요. 이름은 나비정원. 사장님이 봄을 좋아하셔서 나비 정원이라고 해요. 봄이 되면 나비가 많이 오나요? 여쭤봤더니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하와이안 코나와 수제 케이크

하와이안 코나만 22년을 하셨대요. 제주에서만요? 물었더니 육지에서도 하셨다고 그러셨습니다. 궁금한 게 많아져서 이것저것 여쭤봤습니다. 로스팅을 직접 하신다고 하셨어요. 처음 보는 로스터기 모델이라 모델명을 여쭤봤더니, 산 게 아니고 수제로 만든 거라고 하셨습니다. 신기했어요. 옛 연인이 생각났습니다. 네가 봤으면 한참을 떠들었을 텐데. 같이 온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안 했습니다. 방금 생각한 겁니다.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결제를 하려고 카카오뱅크 카드를 내밀었더니 카카오뱅크 카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장님은 카카오가 참 문제 많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까지 씁니다.    


이어 씁니다. 나비 정원에서 나와 자전거를 다시 타고 활엽수로 갔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 돌아 돌아 가느라 조금 추웠고 난무하는 오르막길에 정신이 혼미했습니다. 맞습니다. 오버입니다. 어쨌든 도착해서 간단하게 정리를 하고 양치를 한 뒤 E언니를 만났습니다. 6개월 만에 만나는 E언니, 둘이서 보는 건 거의 1년 만인데요. 언니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데 언니가 마지막날에 저를 데려다준다고 했습니다. 어쩜 사람이 이토록 다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흑돼지 족발을 먹으러 갔습니다. 인당 25000원에 족발, 보쌈, 불족, 막국수, 굴까지 나오는 세트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커피 한잔과 케이크를 25000원 주고 먹었는데요. 엄청난 가성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닌가? 여하튼 밥을 먹으면서 언니의 제주 이야기와 남자 A, B, C에 대한 이야기, 저는 N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카페로 자리를 옮겨서는 언니에게 [사람과 대화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원래 태어나기를 다정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저도 참 바보 같습니다. 대답은 거의 [그냥]에 가까웠는데요, 왜냐면 언니에게는 진짜 그냥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마지막날은 떠나는 날이니까 같이 작별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명쾌한 답변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냥 그녀 자신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왜 이리도 좁은지 다시 한번 돌아보았습니다. 자책하지 않기로 했는데요. 사실 자책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좁다고 말한 건데요. 좁은 게 나쁜 건가요?

E가 선물해 준 '내 여름날의 락스타'

그녀는 저를 활엽수에 다시 내려놓았고 혼자 소주 한 병을 마신 저는 휘청휘청대다 세안을 하고 지금 다이닝룸에 왔네요. 어제와 달리 재밌는 손님들이 오신 모양입니다. 모자로 보이는 손님이 트윈룸을 쓰고 있고, 맞은편 4인룸에는 젊은 커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둘이 보드게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째 게스트하우스를 혼자 오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겨울은 역시 혼자 보내기는 어려운 계절이죠.


꽤나 재밌는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줄이기 전에 솔직한 마음을 말하자면, N의 생각이 납니다. 저는 이럴 때 [잦은 연락은 남자의 마음을 멀어지게 만든다]는 인터넷 조언1을 믿어야 할지, [니 마음 가는대로 해라]라는 인터넷 조언2을 믿어야 할 지 고민이 됩니다. 전자는 N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참고하면 좋을 것이고, 후자는 제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참고하면 좋을테죠. 두 개가 다른가요?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자 합니다. 잠에 들기 전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내키면 다크나이트도 볼 겁니다. 제주에 온 지 3일, 하루가 이렇게 저뭅니다. 벌써 내일은 활엽수 방을 빼는 날입니다. 며칠 더 있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또 새로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나러 가야겠지요.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라는 오래된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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