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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Jan 04. 2024

[12/23] 나는 뭐 하러 여기 왔나요?

1일 차

제주에 왔습니다. 왜 여기에 있죠? 오긴 왔는데 실감도 안 나고 마음이 편안하기만 합니다. 서울에 있을 때와 다른 점은 해야 할 것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들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뭐가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침부터 바삐 일어나 감기 기운을 잡으러 병원에 갔어요. 제주에서 아프면 성가시니까요. 제약도 많아지고. 사실 하고 싶은 게 있지도 않으니 제약도 없습니다. 병원에 다녀와서는 열심히 화장하고 짐 싸고 택시를 탔어요. 신논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9호선을 탔고 김포공항역에 내렸습니다. 그곳은 종점입니다. 땅콩을 까먹으며 노약자석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저보고 옆에 앉으라고 했는데 거절했습니다. [짐 때문에요. ]라고 말했습니다. 역에서 국내선을 타려면 3개 층이나 올라가야 하는데 혹시나 캐리어 바퀴가 에스컬레이터에 걸릴까 봐 긴장을 했습니다.

비행기는 15분 지연되더니 또 15분 지연되어 4시 15분에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9호선 안에서 생각났던 미처 집에서 챙겨 오지 않은 물건들을 살 수 있었습니다. 6만 원이나 지출해서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돈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실 지금 말고 다른 때도 돈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수속을 모두 밟으니 흡연실이 없어 낭패였습니다. 그리고 곧 보안검색대에서 인공눈물과 립밤을 챙기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습니다. 지갑이나 휴대폰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됐네요. 꽤 오랜 시간 그것들을 아쉬워하다가 탑승 줄을 기다리고 있는데 제 앞에 서있는 아저씨는 신분증을 두고 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탑승하고 계신 걸 보니 뭔가 대안이 있었나 봅니다.

19F


19F는 창가자리인데, 복도 쪽에 2명이 앉아 계셔서 미안한 얼굴로 안쪽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비행기 너머로 구름을 봤을 때는 경이로운 감정을 느꼈었는데 오늘은 조금 잠들었네요. 넬의 노래를 오프라인으로 저장해 둔 탓에 제주까지 오는 한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착 후 내려 짐을 찾는데 제 캐리어를 알아보지 못해 한 바퀴를 더 기다렸습니다. 7C123 비행기를 탄 사람 중 가장 마지막으로 짐을 찾았네요. 담배를 피우고 102번 버스를 기다리며 에그드랍을 먹었습니다. 오늘 산 쿠션도 뜯어서 써봤는데 너무 밝긴 하지만 쓸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러 바깥으로 나갔고 다행히 아무런 이슈 없이 버스에 탈 수 있었습니다. 아, 캐리어를 넣고 버스 트렁크를 닫았는지 기억이 안 나서 혼자 조금 불안해했던 것 말고는요. 그리고 한림읍에도 아주 잘 도착했습니다. 숙소를 찾아오는 길도 헤매지 않았고 안내받은 방도 너무 깨끗합니다. 화장실도 썩 나쁘지 않고, 전기장판도 있어 따뜻해요.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노트북을 켰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나는 왜 여기에 있나]하는 생각입니다.

내 방


제주의 명소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도 무언가 뜻을 찾거나 나 자신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듭니다. 나는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여기에 왔을까요. 제주에 가기 전 많은 사람들이 제주에 왜 가는 것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2주나 휴가를 냈으면 다른 곳 가도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거나 혼자 가는 거냐고 묻거나 쉬러 가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물쭈물하는 게 질려서 [그냥 목적 없이 가는 거예요. 뭐 안 하는 연습 하러요.]라고 대답했습니다만 여전히 저도 목적을 찾고 있네요. 나는 여기 뭐 하러 왔나요?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연을 보러 갈 텐데. 전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제주에서 찾을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겠어요. 아마 내일은 짐을 잠시 숙소에 맡기고 밥을 먹고 바다를 보고 카페에서 책을 읽을 것 같아요. 그러려고 했는데… 뭔가 주변에 갈만한 곳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네요. 계획이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작년 같았다면 맛있는 커피를 파는 곳을 구석구석 찾아 마시러 갔을 텐데. 요즘 제가 좋아하는 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방금 찾아봤는데 비양도라는 곳이 있네요. 11시 20분 배를 타고 저기에 가봐야겠어요. 컨버스를 신고 와서 걱정이 됩니다. 다행히 2일 차 숙소 옆에 다이소가 있네요. 메모리폼 깔창을 살 수 있겠습니다만 내일은 발 아프게 걸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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