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차
제주에 왔습니다. 왜 여기에 있죠? 오긴 왔는데 실감도 안 나고 마음이 편안하기만 합니다. 서울에 있을 때와 다른 점은 해야 할 것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들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뭐가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침부터 바삐 일어나 감기 기운을 잡으러 병원에 갔어요. 제주에서 아프면 성가시니까요. 제약도 많아지고. 사실 하고 싶은 게 있지도 않으니 제약도 없습니다. 병원에 다녀와서는 열심히 화장하고 짐 싸고 택시를 탔어요. 신논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9호선을 탔고 김포공항역에 내렸습니다. 그곳은 종점입니다. 땅콩을 까먹으며 노약자석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저보고 옆에 앉으라고 했는데 거절했습니다. [짐 때문에요. ]라고 말했습니다. 역에서 국내선을 타려면 3개 층이나 올라가야 하는데 혹시나 캐리어 바퀴가 에스컬레이터에 걸릴까 봐 긴장을 했습니다.
비행기는 15분 지연되더니 또 15분 지연되어 4시 15분에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9호선 안에서 생각났던 미처 집에서 챙겨 오지 않은 물건들을 살 수 있었습니다. 6만 원이나 지출해서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돈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실 지금 말고 다른 때도 돈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수속을 모두 밟으니 흡연실이 없어 낭패였습니다. 그리고 곧 보안검색대에서 인공눈물과 립밤을 챙기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습니다. 지갑이나 휴대폰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됐네요. 꽤 오랜 시간 그것들을 아쉬워하다가 탑승 줄을 기다리고 있는데 제 앞에 서있는 아저씨는 신분증을 두고 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탑승하고 계신 걸 보니 뭔가 대안이 있었나 봅니다.
19F는 창가자리인데, 복도 쪽에 2명이 앉아 계셔서 미안한 얼굴로 안쪽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비행기 너머로 구름을 봤을 때는 경이로운 감정을 느꼈었는데 오늘은 조금 잠들었네요. 넬의 노래를 오프라인으로 저장해 둔 탓에 제주까지 오는 한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착 후 내려 짐을 찾는데 제 캐리어를 알아보지 못해 한 바퀴를 더 기다렸습니다. 7C123 비행기를 탄 사람 중 가장 마지막으로 짐을 찾았네요. 담배를 피우고 102번 버스를 기다리며 에그드랍을 먹었습니다. 오늘 산 쿠션도 뜯어서 써봤는데 너무 밝긴 하지만 쓸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러 바깥으로 나갔고 다행히 아무런 이슈 없이 버스에 탈 수 있었습니다. 아, 캐리어를 넣고 버스 트렁크를 닫았는지 기억이 안 나서 혼자 조금 불안해했던 것 말고는요. 그리고 한림읍에도 아주 잘 도착했습니다. 숙소를 찾아오는 길도 헤매지 않았고 안내받은 방도 너무 깨끗합니다. 화장실도 썩 나쁘지 않고, 전기장판도 있어 따뜻해요.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노트북을 켰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나는 왜 여기에 있나]하는 생각입니다.
제주의 명소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도 무언가 뜻을 찾거나 나 자신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듭니다. 나는 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여기에 왔을까요. 제주에 가기 전 많은 사람들이 제주에 왜 가는 것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2주나 휴가를 냈으면 다른 곳 가도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거나 혼자 가는 거냐고 묻거나 쉬러 가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물쭈물하는 게 질려서 [그냥 목적 없이 가는 거예요. 뭐 안 하는 연습 하러요.]라고 대답했습니다만 여전히 저도 목적을 찾고 있네요. 나는 여기 뭐 하러 왔나요?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연을 보러 갈 텐데. 전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제주에서 찾을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겠어요. 아마 내일은 짐을 잠시 숙소에 맡기고 밥을 먹고 바다를 보고 카페에서 책을 읽을 것 같아요. 그러려고 했는데… 뭔가 주변에 갈만한 곳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네요. 계획이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작년 같았다면 맛있는 커피를 파는 곳을 구석구석 찾아 마시러 갔을 텐데. 요즘 제가 좋아하는 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방금 찾아봤는데 비양도라는 곳이 있네요. 11시 20분 배를 타고 저기에 가봐야겠어요. 컨버스를 신고 와서 걱정이 됩니다. 다행히 2일 차 숙소 옆에 다이소가 있네요. 메모리폼 깔창을 살 수 있겠습니다만 내일은 발 아프게 걸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