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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Jan 04. 2024

[12/24] 건망증을 50번쯤 들은 하루

2일 차

기억이 날아갈까 봐 3시쯤 카페에서 뭔가 모조리 적어버렸습니다. 옮겨적을까 했는데 그냥 재구성해서 다시 쓸래요. 아침에 8시쯤 일어난 것 같습니다. 아닌가? 더 늦게 일어난 것 같기도 하고요. 라디에이터를 끄고 잤는데도 건조해서 조금 난감했습니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짐을 싸고 화장을 하니 9시 55분쯤 되었던 것 같아요. 숙소에 드립커피가 있길래 내려먹으려고 공용 공간으로 갔습니다. 다크한 원두였어요. 귤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먹고 싶질 않아서 그냥 두었습니다. 크래커와 함께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기타를 조금 만져봤는데 오른쪽 손톱이 녹슨 기타 줄에 닿는 게 썩 맘에 드는 감각은 아니었어요. 오늘 어디 가냐고 스태프분이 물어보셔서, [원래 계획이 없었는데 비양도에 가보려고 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어제 일기를 쓰고 당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찾다가 발견한 게 비양도였거든요. 짐을 맡기고 방을 뺐습니다.

귤 천지


약을 먹는 걸 잊어버려서 편의점에 들렀어요. 물을 한 병 사고 약을 먹고 나가려고 했는데 편의점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습니다. 직장인이냐고 물어보고, 직장이 어디냐, 회사 이름이 뭐냐까지 물어보셨습니다. 보통 그런 건 잘 안 묻지 않나요? 그런데 제가 거기서 불쑥… 서울에서 잘 말하지 않는 제 직장 이름을 말하고 싶어진 것이었습니다. 당최 밝혀서 저에게 도움이 된 적이 없는 제 직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 OOO 다녀요] 하니 아주머니는 따님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딸-아들-딸 3남매를 키우시는 아주머니는 요즘 막내딸 걱정에 한숨을 많이 쉬시는 것 같았습니다. 22살인 따님은 재수를 했는데 이번에도 썩 마음에 드는 대학에 갈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울 영등포에서 it 국비지원 교육을 듣고 싶다고 아주머니에게 말씀하셨다더군요. 아주머니에게 더 이상 그냥 관광객이 아니게 된 저는 번호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따님에게 [OOO 다니는 언니하고 얘기해 봐]라고 말하실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화를 하다가 배편을 놓칠 것 같아서 급히 인사를 드리며 연락 달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렇게 생판 모르는 남을 돕겠다고 번호를 판 건 정말 오랜만입니다. 판 것도 아니네요. 보수를 받지도 않았거든요. 옛날에 스타트업 다닐 때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는데요.


편의점을 나와 캐리어 없이 몸만 끌고 다닐 수 있음에 감사하며 한림항 대합실로 걸어갔습니다. 무슨 노래를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요. 아, 넬의 고양이를 들었어요. 대합실은 진짜 진짜 따뜻했어요. 11시 20분에 출발하는 비양도행 배편을 왕복으로 끊었습니다. 13시 35분에 돌아오는 2시간 코스. 배를 타고 창가에 앉았더니 곧 출발했습니다. 배는 정말 정말 흔들렸고 저는 멀미로 인한 고통에 눈을 꿈뻑꿈뻑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조금 괜찮아졌을 때는 파도를 계속 바라봤습니다. 몇 년 전에도 비슷한 문장을 쓴 적이 있는데, 파도는 커다란 덩어리 같습니다. 그 덩어리가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볼 때 저는 무언가 불가항적인 힘을 느낍니다. 몇 년 전부터 바다만 바라보면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요, 오늘도 자연히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다만 이번이 그때들과 달랐던 건 하나,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게 그렇습니다. 배가 너무 좌우로 출렁여 침몰할 것 같았어요. 그때 생각했어요. [보말죽만 먹고…] 오늘 저는 죽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보말죽 핑계를 대다니요. 사실 그것은 핑계가 아닙니다. 진짜 죽고 싶지 않은 이유였습니다. 너무 춥고 배고파서 죽더라도 보말죽을 먹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상투적이지만 이것만이 오늘 나를 살게 했습니다.

비양도 승선권
보말죽. 따뜻해


하선하니 비가 왔어요. 일단 사람이 들끓기 전에 보말죽을 먹고 트래킹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말죽을 파는 여러 식당들이 있었지만 저는 눈앞에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너무 춥고 감기기운이 올라와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식당엔 저 말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말죽을 주문하고 앉아 있다가 따뜻한 물을 컵에 담았는데 스댕 컵이 뜨거워져서 손을 델 뻔했습니다. 보말죽은 고소하고 따뜻하고 맛있었습니다. 공깃밥 1.5개 정도가 들어갔을까? 생각했어요. 계산을 하고 나가는 길에 사장님께 왼쪽으로 걸을지, 오른쪽으로 걸을지 여쭤봤습니다. 바람 때문에 오늘은 왼쪽으로 도는 게 낫다고 말씀해 주셔서 좋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습니다. 사장님은 짐을 두고 가도 된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저는 [혹시몰라병]이 있기 때문에 그냥 무겁게 걷기로 결심합니다.


오늘의 비양도는 썩 좋은 컨디션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람 떼가 온갖 방향으로 다가와서 얼굴이 맵고 우산이 뒤집혔습니다. 우산을 10번은 폈다 접었다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웠고 자유로웠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날씨였다면 비양도의 경치는 기억에 남았겠지만 몸에 남은 감각은 오늘보다 덜했겠지요. 한 바퀴를 쭉 돌며 사진도 많이 찍고 새 구경도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건 비양봉 언저리의 풍경이었는데요, 비양봉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아래에서 바라보는 비양봉에 억새 비슷한 것들이 보였는데 그게 참 아름다웠습니다. 비 오는 날 비를 뚫고 이인용 자전거를 타는 중년의 커플들도 아름다웠어요. 20분 정도 일찍 대합실에 도착할 수 있어서 한림행 배를 기다렸습니다. 돌아가는 배편에서도 똑같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혹시 몰라 가방 지퍼를 단단하게 닫았습니다. 바다에 빠지면 가방의 물건이 뿔뿔이 흩어질 텐데 그건 싫었습니다. 하지만 곧 따뜻하고 노곤해져서 선잠에 들었습니다. 도착하고 한림항에 내리자마자 구제 옷가게로 출발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분다.

한림종합상가 2층에 있는 작은 구제샵에 갔어요. 208호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 나무네 상점. 계단을 올라가니 어느 상점만 불이 켜져 있고 그 앞에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주르륵 펼쳐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젊은 여성이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어요. 사장님이었습니다. 인사를 하니 밝게 맞아주셨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아무도 안 오실까 봐 걱정했는데 너무 다행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분이 좋아졌고 무언가 부담도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서 옷을 구경하기 시작했는데요. 생각보다 꽤 나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눈길을 빼앗겼던 니트 재킷 같은 게 있었는데, 제 취향이 참 한결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사장님이 커피 한 잔 드릴까요? 하셔서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장님에게 [사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사장님이 분주해 보이셔서 말을 걸 수 없었습니다. 사장님을 기다리다 상단에 걸린 노란 자켓을 발견했습니다. 입어보고 싶어져서 갈아입고 사장님께 보여드리니 너무 예쁘다고 해주셨습니다. 무언가 진심처럼 느껴졌습니다. 결국 그 노란 자켓과 은 도금 목걸이를 구매했습니다. 이 때다 싶어 계좌이체를 하며 아까 묵혀둔 질문을 했습니다. [사장님, 제가 25살인데요. 이제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직도 큰 카라가 있는 발랄한 옷이 좋은데…] 사장님 깜짝 놀라며 [어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입고 싶은 거 입어야 해요. 의식주 중에 하나인데.] 그리고 아까 다녀간 50대 손님이 진분홍 앙고라티를 사갔다는 소리로 그 주장을 완전히 굳혀버리셨습니다. 난 도대체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나에게 맞지도 않는 옷을 자꾸 입겠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평소 같았으면 그냥 흘려버릴 당연하고 진부한 조언인데요. 오늘은 도움이 되었어요. 계산을 하고 있으니 갑자기 꼬맹이들과 함께 손님들이 우르르 들어왔습니다. 사장님은 [손님이 손님들을 몰고 오셨나 봐요] 하고 말하셨습니다. 공효진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지? 그리고 사장님이 간식을 챙겨주시겠다며 과자와 마스크팩 같은 것들을 제 가방에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복도를 따라 걸을 때까지 뒤에서 배웅해 주셨습니다. 33살의 그 사장님이 자주 웃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분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짐을 찾으러 호랑이주택에 다시 갔다가 택시를 타고 카페에 갔습니다. 원래 가려고 했던 카페가 크리스마스 케이크 준비로 홀 운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도보 7분 거리에 있는 다른 카페에 갔습니다. 아주 무난한 라떼와 스콘을 먹으며 이런저런 잡활동들을 하다가 102번 버스를 타고 활엽수에 왔네요. 이 숙소는 아주 조용하고 편안합니다. 따뜻하고 깔끔하고 좋아요. 식당이 따로 있는 걸 보니 사장님은 요리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조식도 무료로 매일매일 요리해서 제공해 주세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앞 방에는 여성 두 분이 멋진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함께 자러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저녁으로 파스타와 카스 한 캔을 마셨습니다. 다크나이트를 보다가 네트워크 문제가 생겨 그만뒀습니다. E언니는 내일 낮에 만나자고 하네요. 좋습니다.

이런 저런 시간들


친구들이 크리스마스에 뭐 하냐고 물어봅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특별하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아주 옛날부터 저한테도 자리 잡힌 생각이었는데요. 올해는 별생각 없네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시점도 제게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저 혼자 이렇게 보내는 것도 좋네요. 와인도 케이크도 스테이크도 안 먹었지만 좋습니다. 아까 약을 먹고 자기 전에 누워서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내일 감기기운이 좀 가신다면 좋을 텐데…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면 저에게 감기를 가져가주세요. 할아버지가 감기 걸리라고 기도하는 건 아닙니다. 이왕이면 잠시 가지고 계시다가 바다 깊숙한 곳에 버려주세요. 아무도 못 가져가게요. 헤어질 결심이 생각나네요.

동백

이렇게 제주 2일도 마무리되었습니다. 내일은 무슨 일이 또 일어날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좋습니다. 그냥 여기 왔으니 여기의 나로 존재하는 것에만 목표를 둘래요.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내일 맛있는 것도 꼭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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