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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Oct 02. 2021

스님이 동냥하는 이유는?

나무 아미타불 할렐루야

불교에서 스님의 정식 명칭은 비구승입니다

남자 스님을 비구라고 하고 여자 스님은 비구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비구라는 말은 인도말로 비쿠에서 왔다고 합니다

비쿠는 음식을 구걸하는 사람, 즉  거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비구승이라 하면  바리때를 들고 인가에 가서 동냥을 하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불교의 수행자(스님)와 일반 걸인은

겉보기에는 똑같이 남루한 옷에 음식을 동냥해 연명하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일반 걸인은 남들에게 밥을 구하여 자신의 육체를 돕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비구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내부 깊숙한 데서 불법(진리)을 구하여 

오히려 외부를 (남들을) 돕는다는 점에서 걸인과 다릅니다                             


기독교와 불교 


불교와 기독교는 전혀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종교라는 동일한 범주로 분류되는 사회 현상이기에 여러모로 비교 가능합니다


불교의 사찰은 기독교의 교회에 비유될 수 있고

불교의 법전은 기독교의 성경에 비유할 수 있으며

불교의 스님은 기독교의 목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스님이 동냥을 해서 육체를 유지한다면

기독교의 목사는 성도의 헌금으로 생활을 유지합니다


이렇듯 동냥과 헌금은 매우 닮은 듯하면서도 차이점이 있는데

이 둘을 비교해 보면 의외로 깨닫는 바가 많습니다


우선 동냥은 자비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동냥을 거지가 먹을 것을 구하는 행위로만 알고 있는데

원래 동냥이란 말은 불교용어 '동령'에서 나온 말입니다


즉 동령(요령을 흔들다)이라는 말을 비하한 말로써

조선시대에 스님들이 걸식할 때 지금처럼 목탁을 치는 것이 아니라

요령을 (짤랑짤랑) 흔들었던 것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왜 동냥을 하는 걸까?


모든 고등 종교는 보편적 선을 추구합니다

불교 또한 고등 종교이기에 선을 추구합니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선은 자비입니다

그리고 자비의 핵심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남을 돕는 것을 핵심가치로 여기는 불교의 수행승이

남을 돕지 않고 도리어 남에게 도움을 받으며 수행을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남을 돕는 방법에는 여러 등급이 있습니다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남을 돕는 다면 이는 쉬운 것으로 하급에 속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물질을 시주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즉 물질로 남을 돕는 것을 가장 쉬운 자비로 여겼던 것입니다

참 수준 높지요? 우리로서는 지갑 여는 일이 제일 어려운데 그것을 가장 쉬운 일로 여겼다니 말입니다


그다음으로는 시간을 내는 일입니다

시간을 쓴다는 것은 함께 한다는 말이며 이는 곧 마음을 주는 일입니다

물질은 주어버리고 나면 끝이지만 시간은 끝까지 함께 해 주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돈보다는 마음 쓰는 일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최고의 높은 수준의 자비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법이라고 하고

자비를 베푸는 행위를 '보시'한다고 하는데

진리를 설파하는 '법보시'를

물질을 베푸는 일보다도,

그리고 마음을 나누는 일보다도 더 등급이 높은

최고의 자비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우친 자는 곧 열반, 해탈 (기독교 식으로 말하자면 구원)을 얻기 때문인데

그 어떤 베풂보다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도움보다 큰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법을 베풀기 위해서는 우선 법을 깨우쳐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일은

올바른 법보시를 베풀기 위한 진리탐구였던 것입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바로 이 일에 부름 받은 사람이며

법보시에 매진하기 위해서  양식을 동냥하는 것입니다


즉 스님들이 동냥을 하는 이유는 (무소유라든가 여러 부수적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일체의 속세에 관한 일을 떠나

오직 진리 탐구에 매진하여

올바른 진리를 베풀겠다는 굳은 결의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있기에

옛날에는 스님들이 민가에 내려와  요령을 흔들며 음식을 구하면

사람들은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음식물을

스님들의 바리때에 조심스레 담아주며

오히려 감사했던 것입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불교에서 스님들의 당당한 동냥 요구와

이에 대한 당연하고도 공손한 시주는  


스님들에게 베푼 물질이 결국에는 자신을 구원으로 이끈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혜민 스님 사건


얼마 전 불교계에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의 베스트셀러로 유명한 혜민 스님 이야기입니다

혜민스님은 미국 명문 하버드 대학 출신에다 IT 쪽에도 해박하여 '코끼리'라는 명상 앱을 만든 '마음 수업'이라는 주식회사의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고리타분한 이미지였던 불교계에 참신한 이미지를 보여준 그는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많아서

TV 프로그램 등에도 출연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한 TV 프로그램 방영 중에 그 스님의 남산 뷰 자택이 소개되고

또한  미국 뉴욕에 있는 아파트 구매 의혹까지 받으며

무소유가 아닌 이른바 '풀 소유' 논란이 불거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미국 하버드 대학 출신의 똑똑한 스님이

무슨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능력으로 종교의 대중화를 이끄는 가운데

남산 뷰가 보이는 자택에서 기거하는 것은 그리 큰 잘못은 아닙니다.


종교인으로서 비록 보기에는 안 좋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심하게 지탄받은 만한 일도..  커다란 이슈가 될만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벤츠 타고 다니는 스님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정작 문제가 된 것은 혜민 스님의 안거 기록이었습니다


안거란 불교에서 (동안거와 하안거) 겨울과 여름 이렇게 일 년에 두 차례

스님들이 바깥출입을 끊고 참선 수행에 힘쓰는 일을 말합니다.


안거 기간 중 스님들의 생활은 엄격함을 넘어서 고행에 가깝다고 합니다

새벽 3시에 기상해 정돈을 마친 후 108배 기도를 시작으로 하루 평균 11시간 참선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참선은 일종의 기도로써 하루에 11시간씩 오직 기도만 하며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안거에 몇 차례 참여했는지를 승려의 수행 정도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문제는 혜민 스님의 경우 안거 기록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즉 법 보시를 위한 진리 탐구와 참선이 

승려의 존재 이유인데도 불구하고

혜민 스님에게는 안거 기록이 전무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자

그동안 혜민 스님을 옹호하던 여론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결국 혜민스님은 모든 활동은 중단하고 반성하며 칩거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보시와 헌금


목사인 제가 불교의 스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같은 종교인으로서 이에 대해  느낀 바와 배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불교도들은

스님들이 진리탐구에 매진할 것을 믿고

그들의 진리탐구를 돕기 위해 기꺼이 보시를 행합니다

즉 스님들이 수행에 힘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최소한 불교 신자들은 자신의 공양이 (자신의 헌금이)

어떤 원리로 자신에게 복이 되는 지를,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왜 헌금을 해야 하는 지를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의 헌금에 대한 이해는 이에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십일조와 헌금을 기꺼이 내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성경이 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구약성경이 이를 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십일조를 레위 족속의 생계를 위한 분깃으로 하나님의 명령으로 기록하고 있고

또한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복을 받게 될 것과 불순종함으로써 벌을 받게 될 것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경우는 이와는 조금 다른데

신약성경의 경우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연보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헌금을 하든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연보를 하든


결국 우리는 그 헌금이 자신을 구원의 길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헌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들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은

헌금이라는 행위 자체는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복을 많이 받고 천국도 수월하게 갈 수 있다는 믿음은

그저 우리의 착각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에서 구원의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라디어서 2장 20절) 라는 성경 말씀처럼


내 안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사는 듯한 

그러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는 곧 내가 그리스도 예수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이 사셨던 대로,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우리는 다 압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삶 가운데 행위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며

그렇기에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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