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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엽 Oct 23. 2021

이상한 일

이번에야 말로 교회를 떠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지긋지긋한 하나님, 나에게 두 번씩이나 참을 수없는 아픔을 안겨준 하나님. 이제야 말로 그 하나님과는 영원한 작별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아내의 장례식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젊은 나이에 두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대기업 자동차 회사 광고팀 대리의 장례식이었다. 아내가 암투병할 동안 처가의 교회와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아내의 완치를 위해 특별 새벽 기도회를 여는 등 아내의 투병 소식은 두 교회 전 교인의 관심사였던 터라 수많은 교회 사람들이 다녀갔다. 


나는 교회 사람들의 인사를 싸늘한 눈으로 외면했다. 그깟 하나님을 도대체 왜 믿는 걸까? 하나님을 신앙하는 그들의 모습이 우스웠다. 그 하찮은 신앙 때문에 진통제 한 알 못 먹고 고통 가운데 떠난 아내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 미칠 것 같았다.


장례식 첫날 사람들 한 귀퉁이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중학교 때 절친이었는데 고등학교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각자 결혼 후 다시 만나게 된 반가운 친구였다. 우리는 부부동반으로 식사 모임도 자주 갖고 아내끼리도 잘 어울렸다. 친구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모태 신앙인이었는데 중학교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나를 전도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내 기억에도 일요일에 그 친구가 교회에 나를 초대해서 교회에 나갔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이유는 당시 멋모르고 예쁜 여학생들 많다는 친구의 꼬드김에 넘어가 교회에 나갔는데 한참을 같이 웃고 떠들던 또래의 아이들이 예배가 시작되고 기도 시간이 되자 갑자기 전혀 딴사람이 되어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모습에 기가 질려 이 후로 한 번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그 일 이후 자신의 경솔한 전도로 인해 내가 신앙을 가질 기회를 잃은 것이라며 신앙적 죄책감에 시달려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만나 보니 내가 교회의 리더가 되어있어 너무나도 놀랍고 신기하다면서 나에게 감사했다. 그 친구는 열렬한 신앙인답게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 친구가 아내의 장례식장에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채 아내와 함께 먼발치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내심 반갑기는 했지만 그가 목사라는 사실이 떠올라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 친구는 나를 바라만 볼뿐 내게로 오지는 않았다.


둘째 날에도 인산인해였다. 나는 넋이 나간 채로 앉아 있었고 그 친구와 아내와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뿐 내게로 오지 않았다. 


마지막 날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조금 뜸해졌다. 여전히 나는 넋이 나간 채로 있었고 그 친구와 아내와 유모차의 아기가 보였다. 이번에는 내가 친구를 불렀다. 아무 말 없이 친구가 다가왔다. 내가 먼저 하소연했다. 세상에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억울해서 미치겠다고 친구에게 따져 물었다. 또다시 아이스크림과 진통제 생각이 올라와서 분통이 터졌다. 죽은 아내에게 미안해서 미칠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친구는 나의 하소연을 아무 말 없이 들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동엽아 아내에게 미안해하는 너의 마음 충분히 이해해.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아. 그런데 혹시 아내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봤니?

아내의 영혼은 지금 천국에 있을 거야.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 말이야. 예수님의 품 안에서 아내 역시 애처로운 심정으로 너와 너의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겠지. 아이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이 오죽하겠어? 자비로운 신 예수님이 네 아내의 슬픈 표정을 보시고 아마도 아내가 원한다면 다시 이 땅에 아이들과 네 곁으로 돌려보내주실 수도 있을 거야. 예수님이 못하실 일이 뭐가 있겠니?

그럴 때 네 아내가 뭐라 대답할까? 나 같으면 사양할 것 같아. 아내는 지금 천국에 와 있는걸. 너와 아이들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천국에서 다시 만날 텐데. 오히려 아내는 너에게 미안해할 것 같아. 예수님의 제안을 사양해서 말이야. 그러니 너무 아내에게 미안해하지 마"


순간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오히려 아내가 나에게 미안해할 거라고? 지금 천국에 있다고? 


천국은 나에게 언제나 실제였다. 아니 실제여야만 했다. 엄마가 계신 곳이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죽음으로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 바로 천국의 실제가 아니었던가?


친구가 돌아가고 장모님과 잠시 이야기 나눌 짬이 났다. 사람들은 모두 장모님의 건강을 우려했다. 나이 40이 넘어 출산한 귀한 딸에다가 평소 신앙의 스승이라며 각별한 사랑을 나누었던 딸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모님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예상 밖이었다. 

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아 혼절할 것 같다가도 이상하게 느낌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환하게 웃는 딸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밝고 예쁘게 보여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는 것이다. 슬픔이 밀려오다 가도 하늘만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모님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아내가 천국에 있다는 친구의 말과 장모님의 말씀이 오버랩되면서 나는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도무지 주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는데 그 썩어 문드러졌던 마음에 새살이 돋아 나는 듯했다.  차츰 생각이 정리되었다. 


만일 죽음이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삶이 있어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만일 아내가 유학 가서 공부하는 것이 소원이라며 5년 정도 떨어져 지내는 유학을 보내달라고 나에게 간청하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평생소원이라면 그 정도는 보내 줄 수 있을 것 아닌가? 어차피 유학 끝나면 다시 만날 텐데.. 그 유학의 기간이 10년이면 어떨까? 아니 30년 50년이면? 그런데 유학 마치고 영원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비로소 나는 아내에 대한 쓰라린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늘을 올려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윤지야 너는 좋겠다. 먼저 천국 가서."




 새로운 삶  


두 번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어느 정도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너무 막연했다. 엄마와 아내가 천국에 있다는 믿음으로 인해 이별의 고통에서 어느 정도 벗어 날 수 있었지만  막상 그 천국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메커니즘으로 갈 수 있는 곳인지는  막연했다. 


그러던 차에 장모님은 나에게 신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유하셨다.


5호선 광나루역에 장로회 신학교가 있다. 우여곡절을 거쳐 35세의 나이에 신학생이 되었다. 신학교에 입학만 하면 해답을 얻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인생의 의미는커녕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기도 힘에 부쳤다


그러다 3학기를 마칠 즈음에 또다시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을 한 둘째 누님으로부터 미국에 와서 신학 공부를 하라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트렁크 2개에 옷가지를 담아 아이들 손을 잡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 생활은 누님과 매형이 잘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정착하게 되었다. 매형과 누님은 서로가 재혼이었는데  첫 결혼에 실패 후 신앙적으로 성숙해져서 교회 일에 아주 헌신적인 신앙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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