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목사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나에게 구원과 믿음에 대해서 물어온다
믿어야 구원받는 다는데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그래서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등등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가끔 감이 잡힐 때도 있지만 말로 설명하려 하면 늘 부족함이 느껴진다. 설명하는 순간 그 개념은 단지 내 머릿속에서 나온 구상물이 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수많은 질문들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삶과 죽음의 의미부터 존재와 믿음과 구원 문제 등 이러한 문제에 답을 구하고자 목사까지 된 것 아닌가?
히브리어를 공부해 보기도 하고 헬라어로 성경을 읽어 보기도 하지만 속 시원한 답은 찾기 어려웠다. 도서관에 쌓인 방대한 자료들을 바라보며 열심히 공부하면 언젠가 답이 풀리겠지 라고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에 앞서 먼저 해결해야 할 '더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수 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삶과 죽음과 자신의 구원과 믿음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불안해서 일게다. 구원에 대한 불안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 일게다. 현재의 삶에 평안과 만족함을 누리는 사람은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경우를 돌아보면 맞는 말이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묻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여행을 다니다 보니 그런 질문이 사라졌다. 이후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삶과 죽음과 구원에 대한 질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미 배부른 사람은 어디 가면 빵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삶과 죽음의 의미가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이미 구원받은 자임을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는지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질문이 사라진 사람의 특징은 평안함이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무엇이 구원인지 설명할 수는 없어도 구원받은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는 설명할 수 있다. 바로 평안한 모습이다. 삶 가운데 안식을 누리는 모습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백성들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시고 부활하신 후 무덤가에서 처음 만난 두 여인에게 건넨 첫마디는 그저 "평안하뇨?" 하는 말이었다. 구원은 그리 복잡한 개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안식을 누리고 있으면 바로 구원이다. 지금 이대로 아무 문제 없으면 바로 구원인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만족하며 평안을 누리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늘나라며 바로 그 순간이 구원인 것이다.
그러나 그 평안과 안식을 내가 도달해야 할 어떤 경지나 혹은 성취해야 할 목표로 이해하는 순간 이미 구원은 물 건너간다. 동일한 순간 동일한 장소에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어디나 하늘나라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어디나 괴로움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오해하지 말자.
구원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다만 지금 이 순간 아무 문제없음을 깨닫고 그저 누리는 것이다
질문이 일어나지 않는 평안한 마음을 그저 마음껏 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