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담다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만추 Apr 10. 2020

식물 기르는 사람(中)

식물 기르는 남자

웹툰 <어쿠스틱 라이프>를 읽다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어설프지만 로망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다 보면 어떤 로망은 은근슬쩍 현실이 되어 있기도 하다.’ 만화 속 작가는 베란다가 없는 집에서 살며 베란다 정원을 꿈꾸었다. 누구에게는 헛된 로망처럼 보였겠지만, 시간이 흘러 그녀는 베란다가 있는 집을 갖게 되었고, 그곳에서 식물을 기르게 되었다.

     

식물 기르기에 대한 나의 로망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몇 년 전, 희곡 수업을 들으며 식물 기르는 남자, ‘태수’라는 인물을 만들게 된 것이다. 태수는 인물 만들기 과제를 하며 탄생했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최근 3개월 이내에 처음 만난 사람, 그중에서도 잘 모르는 사람을 선택하여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인 인물을 창조하는 과제를 내셨다.     


살면서 누군가를 이렇게나 관찰해 본 적이 있을까. 희곡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희곡 수업이 재밌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누구보다 칭찬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과제를 잘 해내고 싶었다. 과제를 받자마자 나를 스치는 모든 얼굴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보며 그의 인생을 상상해 본다는 어떤 작가처럼, 나를 마주친 모두에게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 덧붙여 줄 것 마냥.      


태수의 모델이 되는 사람은 수원역에서 마주쳤다. 지하철을 타러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중단발에, 수염을 기르고 카키색 점퍼를 입은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금목걸이가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왜인지 운동화 한 켤레가 들려있었다(그가 맨발로 걷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 운동화를 들고 있을까. 그에게 시선을 빼앗긴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다 내 나름의 이유를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그가 자유분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연습을 하고 있다면?      


눈덩이가 불어나듯 상상에 또 다른 상상이 덧붙여졌다. 자유분방한 사람이 되겠다고 갑자기 맨발로 걷다가 추워서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신발 신으면 재밌겠다. 머리랑 수염을 기르는 것도 자유분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인 거야. 인터넷에서 보헤미안 스타일 검색해 보고. 왜 자유분방한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하는 걸까. 자발적 백수가 되기로 한 거야. 어쩌다가 자발적 백수가 되기로 한 걸까. 너무 열심히 일하다가 과로로 쓰러진 거야. ‘현타’가 온 거지.     


자발적 백수가 되어 여유롭게 살고자 노력하지만 매번 실패하는 사람.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자유분방한 삶을 살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따르는 사람. 내가 만든 태수는 그런 인물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태수는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낼까 생각하다가 ‘텃밭 가꾸기’를 떠올렸다. 대리만족을 위해, 내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태수에게 준 것은 아니었다. 태수라는 인물 프로필을 완성하고 보니, 그가 방울토마토를 키우고 있는 게 아닌가.      


작정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식물 기르기에 대한 로망이 태수가 식물을 기르게 되는 데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창조한 인물에게 방울토마토를 기르도록 만들어 놓은 강력한 무의식의 힘에 감탄하며 생각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태수 너라도 식물을 열심히 길러 봐라.(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야채부족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