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담다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롱박 Apr 13. 2020

라일락 스무 그루, 그리고 연극영화과

에세이 - 식물, 동기  나무에 대한

때는 바야흐로 벚꽃이 지고 연둣빛 새싹이 돋던 봄. 3학년이 된 연극영화과 친구들은 봄 MT를 앞두고 있었다. 봄 MT라 함은 신입생과 선배들이 제대로 된 만남을 갖는 시간으로 그- 빡센 군기를 이겨내고 제법 고학번이 된 우리들은 어깨에 조금 힘이 들어가 있었다. 후배도 두 기수나 받았겠다. 공연도 몇 개 올려 봤겠다. 연극영화과 뽕을 잔뜩 먹은 우리들이었다. 


그 저 그 그러니까 우리 때는 그랬다. 그 옛날의 연극영화과라 함은, 치열한 입시를 뚫고 들어온!(이건 사실이지만 모든 예술학과가 그렇지) 오로지 예술을 위해 20대를 불사르고 있는!(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고) 온 캠퍼스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그냥 자의식 과잉인) 전국에서 가장 이상한 아이들을 모아놓은!(이건 사실) 곳으로써 당시의 우리들은 자기 연민과 자아 비대가 뒤섞인 매우 불안정한 아이들이었다. 


그런 우리가 3학년이 되었고 그저 끌려가던 MT를 이제는 주체적으로 기획하고 이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좀 신이 날 수밖에. 지난 2년간 불안한 서로를 의지하며 끈끈한 동기애를 다진 우리들은 봄 MT를 앞두고 몇 가지 부산스러운 것들을 준비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멤버십의 증거라 할 수 있는 동기 티셔츠! 학교 앰블럼과 과이름 그리고 우리의 기수가 멋들어지게(그땐 그런 줄 알았다) 쓰인 동기 후드티를 하나씩 나눠 입고 우리는 예술관 앞에 모였다. 집합 시간보다도 1시간 일찍! 우리에겐 아주 중요한 두 번째 미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의 메인이벤트는 바로바로 '동기 나무 식수 행사'!!

'동기' 나무라니. 동기 '나무'라니. 정말 집단의식에 완벽하게 세뇌당한 사람들 만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우리는 그때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열정과 애정을 증명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당시 학년 대표를 맡고 있던 나는 공금을 들고 다른 동기 한 명과 함께 아침부터 양재 꽃, 나무 시장으로 향했다. 계획은 이랬다. 유실수, 그러니까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한 그루 사서 멋들어지게 심은 다음 정기적으로 이 나무 앞에 모이며 언젠가 이 나무가 아름드리나무로 크-게 자랐을 때 우리도 성공한 모습으로 나타나 그 앞에서 '그땐 그랬지~' 하며 옛 추억을 떠올려 보자. 열매도 수확해 보자. 뭐 그런 계획. 

내 1 지망은 복숭아나무였다. 역사는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이루어지곤 했으니까. 형제가 되기로 맹세도 하는 나무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양재동으로 향했고 이런 생각을 해 낸 내가 기특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무는 생각보다 비쌌다... 정말 많이 많이 비쌌다. 정말 '나무'라고 부를 수 있는 모양의 것들은 몇 십만 원이 훌쩍 넘었고 우리가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은 막대기 같이 생긴 묘목들이었다. 가지도 잎도 꽃도 없는, 지금 당장이라도 회초리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나무 막대기들. 너무나 실망이 컸지만 우린 멈출 수 없었다. 동기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열차는 달려야 했다. 우리는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살펴보았고 사장님의 추천으로 라일락 묘목(이라쓰고 막대기라 읽자) 스무 그루를 샀다. 꽃이 만발할 거라는 향이 정말 좋을 거라는 사장님의 그 말을 위안으로 삼고. 

나뭇가지 스무 개를 들고 나타난 나를 보고 동기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날, 멋진 나무를 사 오겠다 큰소리쳤던 나는 분명 실력 없는 나무꾼처럼 보였을 거다. 나무를 해오진 못하고 오며 가며, 산길에서 부지깽이나 주워온 애송이. 예술관 건물 앞에서 커다란 삽을 들고 기다리던 동기들은 그런 나를 보고 아주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역시, 동기사랑 나라사랑.

라일락 스무 그루 심기는 금방 끝났다. 연극영화과 학생들답게 무대 작업으로 익숙해진 일손들은 척척 땅을 파고 훅훅 막대기, 아니 묘목들을 심고 촥촥 물을 뿌렸다. 그리고 연극영화과 학생들답게 나무를 심는 것보다 더 공을 들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무릎까지 겨우 오는 그 짧고 앙상한 가지들과 함께 우리는 사진을 찍었고. 봄 MT를 갔다. 


그 해 동기 나무는 잎도 나지 않았고 꽃도 피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몇 그루가 말라 쓰러졌다. 미션은 실패한 듯 보였다. 다행히 다음 해, 동기 나무는 잎이 조금 났다. 하지만 꽃이 피진 않았다. 꽃 봉오리도 맺히지 않았다. 스무 그루 모두가 다 죽지는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리고 너무나 뻔한 스토리이지만 우리는 연애하느라 공연하느라 졸업하느라 바빴고 그 나무들은 점점 기억에서 잊혔다. 


대학 졸업 후, 영원히 함께 서로의 곁에 예술적 동지로 있을 것 같았던 우리는 각자 사느라 바빴다. 입학은 함께 했지만 졸업은 같을 수 없었고 동기 나무가 있었는지, 동기가 있었는지, 연극영화과가 있었는지, 하면서 점점 나이를 먹었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현장에서 일하며 몇 년이 지나 운 좋게 모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그 나무가 생각났다. 이 학교에서 내가 아는 생명체라고는 오직 그 나무만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를 하던 건물에서 나무가 심겨있는 예술관 까지는 작은 언덕을 하나 넘어가야 했다. 수업을 마친 어느 날 오랜만에 그 언덕을 넘어 동기 나무를 찾았다. 


여전히 연극영화과가 있는 예술관 앞 화단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라일락 꽃이 피어 있었다. 아직 키는 작지만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스무 그루였던 라일락 묘목은 겨우 다섯 그루 남짓 남아 있었지만 살아남은 묘목들은 제법 단단하게 자라 있었고 이제는 정말 '나무'처럼 보였다. 향기로운 보랏빛 꽃이 가득 핀 튼튼한 라일락 나무. 

30대의 나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막대기들이 나무가 되었구나. 뿌리를 내리고 잎을 내고 꽃을 피웠구나. 그리고 누군가 꾸준히 가꿔준 흔적도 보였다. 잡초도 뽑아주었고 물도 주었다. 아마 학교 조경관리사 분들이 이 나무까지 살펴주신 것 같았다. 


이상했다. 잘 자라고 꽃도 만발했는데 기분이 마냥 좋지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스무 그루의 묘목들이 4분의 1만 남아 나무가 되었다. 마흔 명이었던 우리 동기들은 지금 몇 명이나 남았을까. 여전히 학생 때의 열정으로 연기를 하고 연극을 하고 예술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조금 괴로워졌다. 예쁜 꽃을 앞에 놓고 괴로워하는 게 이상했지만 그랬다. 나는 이 4분의 1이 될 수 있을까?


20대의 열정으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물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다. 치기, 객기를 걷어내고 차분하게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 안전한 세상이던 대학을 벗어나서 현실을 만나면서 거대하던 자아가 깎이는 게 맞는 일이겠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나를 만들고 어른이 되는 게 맞는 일이겠지. 

학교 앞에 심어진 라일락 동기 나무는 나이브하던 나의 20대를 증명하는 것 같아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까지 진심이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 지금의 나를 계속해서 뜨끔하게 했다.


실패한 나무꾼의 모습을 하고 있던 어느 봄의 나를 떠올려 본다. 20대 초반의 나를 떠올려 본다. 예술이 좋아서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이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르던 나를 기억해 본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때의 우리가 라일락 나무에 꽃을 피웠다. 모두 잘 지내고 있을까? 모두 자기만의 꽃을 피워내고 있을까? 


4월. 다시 라일락이 피는 계절. 올해도 라일락 꽃이 만발할 그 나무가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가 피운, 앞으로 피워낼 꽃들 역시. 

열매를 수확할 수는 없지만 향이 가득할 그 나무 앞에서 언젠가 함께 만나는, 

있을 수 없을 어떤 날이 많이 궁금하다. 


만개한 막대기, 아 아니 라일락 동기나무


매거진의 이전글 식물 기르는 사람(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