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창작주제 <반려식물>
어렸을 적 <아름다운 그대에게>라는 만화를 좋아했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아시야라는 소녀가 동경하던 높이뛰기 선수(사노)를 만나기 위해 기숙사제 남자 고등학교에 남장을 하고 들어간다. 남장한 것이 밝혀지고, 숨겨주고 하면서 사랑은 싹트고, 이러쿵저러쿵, 엎치락뒤치락. 대부분의 로맨스물이 그렇듯 여기에도 남주(사노)와 서브남주(나카츠)의 사랑을 여주(아시야)가 한 몸에 받는 구도가 등장하는데, 나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나카츠파였다.
나카츠의 진지하지 않고 개구쟁이인 성격도 좋았고, 밝은 염색머리에 축구를 하는 활력 있는 인간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주된 연애 서사의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시리즈의 중반 너머까지 자기 마음을 밝히지 않는 사노에 비해, 나를 좋아하는 감정을 초반부터 다 드러내며 쩔쩔매는 나카츠가 너무 귀여웠다. 아, 그러니까 아시야를 말이다. 아무튼 나에겐 이 만화가 내가 댕댕이 계열의 서브남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카츠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는 해바라기다. 초반 권수의 표지들에 매번 등장인물 한 명과 그에게 어울리는 ‘이미지플라워’ 하나씩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해맑은 짝남이라 하면 물구나무를 서서 생각해도 해바라기인데, 그때는 나카츠의 이미지플라워로 해바라기가 선택됐다는 사실이 너무 참신한 발상처럼 느껴졌다. 그 이미지가 맑고, 청량하고, 힘차게(?) 느껴졌고, 나카츠 덕에 덩달아 해바라기도 좋아졌었다.
만화를 읽다 보니 이 작가님은 사람 자체를 어느 정도 꽃에 빗대어 표현하고 계시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만화책을 같이 보던 친구가 특히 좋아하던 부분이라 나도 다시 보게 된 부분이 있었다. ‘아시야는 이제 막 꽃을 피우고 있는 단계다,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다.’ 뭐 이런 식의 내용이었다. 화면엔 가슴을 압박붕대로 가린 아시야가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던 것 같다. 얼마나 정확한 기억인진 모르겠지만, 내 또래의 마음을 휘어잡은 장면이라 생각하고 다시 보니 내 뇌리에도 그 이미지만은 강렬하게 남았다.
일견 맞는 묘사 같기도 했다. 이 만화 자체가 여학생이 남고에 남장을 하고 들어와서 이성애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만화니까, 2차 성징이 뚜렷해지는 장면이 큰 위기상황처럼 극적으로 묘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꼭 몸의 변화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처음 사랑하게 되는 어지러운 감정 상태를 묘사한 장면이기도 했다. 식물로 치면 개화가 생애주기의 극적인 변곡점 중 하나니까, 거기에 주인공의 현 상황을 대입했을 수도 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나는 그 장면이 좋아지지까진 않는 것 같다. 꽃이 핀다는 말은 나중엔 시들기도 한다는 뜻일까. 청춘이 꽃핀다는 말이 원래 존재하긴 하지만, 왜 하필 여자인물의 경우 그 꽃피는 과정(?)이 장면으로까지 그려지는 걸까. 왜 여자가 꽃이야, 어떻게 보면 큰 힘을 내포하고 있는 게 꽃이지만, 또 관상용이라는 문화적 관습도 절대 무시할 순 없잖아. 마음 놓고 좋아하기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던 것이다.
만화를 보며 꽃에 설렜다가, 다시 그 구체적인 의미가 다르게 느껴져 마음이 차게 식은 경험은 한 번 더 있었다. 연기 천재 소녀 기타지마 마야의 고분구투 성장기를 그린 <유리가면>에서도 꼭 그랬다.
뒷배경이 전혀 없이 연기의 세계에 뛰어든 마야에겐 정체를 숨긴 팬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보랏빛 장미의 사람’(남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이 팬은 항상 마야의 초연이 끝나면 당신의 연기를 잘 봤다는 카드와 함께 보랏빛 장미다발을 맡기고 간다. 정체를 숨긴 것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다른 뜻 없이 당신을 존경하겠다는 의미리라. 그리고 장미가 보라색인 이유는, 마치 그 장미처럼 마야 역시 독특한 자기만의 색이 존재하는 배우라는 뜻이리라.
나는 만화 초반에는 보랏빛 장미를 두고 가던 마스미(남주)가 마야(여주)에게 흑심을 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마스미는 마야보다 나이도 한참 많은데다가, 만화 그림체의 문제이긴 하지만 마야는 마스미의 반 토막만해서 아예 둘이 사는 세계가 달라보였던 것이다. 어쨌든 마야는 결국 자신을 사모하던 마스미와 보랏빛 장미의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서사 상으로 보자면 이 부분이 하나의 클라이맥스긴 하다.) 내가 마야였다면 그때 이런 생각도 들었을 것 같다. ‘결국 그 팬은 내게 연정을 품은 남자였구나. 좀 아쉽네.’
나는 물론 아시야나 마야같이 여성으로서 성장기를 거쳐 온 적은 없다. 하지만 이들을 묘사하는 문화적 관습들이 결국 나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한다. 나는 사람이 꽃처럼 때가 되면 성적 매력이 개화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적 매력이란 건 분명 존재하지만, 그건 자연계의 만고불변의 법칙에 빗대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꽃은 앞으로 백 년 후에도 똑같이 피겠지만, 우리가 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앞으로 백 년 후엔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을 지도 모른다.
꽃 선물에도 데이트 대상에 대한 호감 표현 이상의 더 많은 의미가 담길 수 있다고 믿는다. <유리가면>만 해도 그들의 연애 서사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사심 없는 팬심이 주는 감동을 많은 부분 빌려오고 있지 않은가.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 항상 연애와 관련 있는 순간들일 필요는 없다. 세상이 핑크빛이 아닌 보랏빛으로 물드는 경험 역시 충분히 설렐 수 있다.